잃어버린 날을 찾아 나온 복귀역사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8권 PDF전문보기

잃어버린 날을 찾아 나온 복귀역사

만일 인류 시조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가정을 이루었다면, 그 가정을 이루는 날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날이요, 하나님의 기쁨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로소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는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날은 우리 인간시조 아담과 해와가 참된 부모로서 출발을 하는 날이요, 인간만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만물까지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 인류의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고대하시던 이상적인 그날을 잃어버리고, 인류가 고대하던 참된 날을 잃어버리고, 만물이 고대하던 참된 날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잃어버린 날들을 다시 찾기 위한 것이 구원섭리요. 복귀섭리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복귀해 나가야 되느냐? 만물을 조건삼아 가지고 거꾸로 올라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조건은 사람이 아니라 만물이었던 것입니다. 만물을 제물로 드려 왔던 거예요. 거기에서 한 단계 끌어올려 가지고 제물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오는 역사를 지금까지 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시대로부터 기독교를 중심삼은 신약시대를 거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제물과 일체될 수 있는, 제물 대신될 수 있는 세계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제물의 실체로 오셨기 때문에 전체의 제물을 주관할 수 있는 제물의 중심 존재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물질적인 제물을 직접 장악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는 중간 역할을 하기 위하여 오셨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 가셨던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려면 반드시 백성이 있어야 되고, 나라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백성이 합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죽은 제물이 아닌 승리적인 제물, 즉 부활된 실체로서 제물을 몽땅 하나님께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제물의 실체되는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조건을 벗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잘못 드리면 사탄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중간에 세워 놓고 분립시키기 위한 조건물이 제물이기 때문에 제물은 잘못 드리면 사탄 앞에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요, 잘 드리면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이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친 역사가 되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을 중심삼고는 그런 역사시대를 넘어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묶어 바쳐 가지고 완전히 승리한 터전 위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그 사회, 즉 하나님만이 주관할 수 있고, 사탄은 참소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승리적인 환경을 마련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가 예수님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기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중심삼고 이것을 재편성해서 세계적인 발전을 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제 1이스라엘의 기반을 닦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특정한 국가나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민족과 국가를 지도하는 특정한 종교로서 기독교가 발전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기반을 완전히 멸하고 영적인 세계에 이루어질 나라를 바라보면서 발전해 나온 것도 아닙니다. 소망의 나라, 천국을 그리워하고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영적인 발전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 발전이란 민족 편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민족 편성을 이루기 위한 개인 개인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인 것입니다. 이리하여 개인 개인의 구원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제2이스라엘권을 이루어서, 다시 이 지상에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백성을 편성해 놓고 하나님 앞에 승리적인 제물을 바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이러한 탕감의 노정을 거쳐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