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작용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38권 PDF전문보기

양심 작용

그러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사랑합니까? 여기에 있는 아주머니들, 아기를 낳아가지고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어디에 사랑을 가르치는 소학교가 있어요, 중학교가 있어요? 무슨 고등학교, 대학교가 있어요? 거기에 무슨 학박사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지만 누구나 그 기준은 만점입니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욱 완전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완전한 것은 손댈 필요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가감이 필요하지 않을수록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변치 않는 것이요, 변치 않는 것은 영원히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잘못하면 양심은 야단입니다. 잘못하는 것도 야단이지만 잘하지 않으면 이것도 야단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양심은 `너는 옷을 두둑히 입고 배도 부르고 부러운 것이 없으니 저 길가에 있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합니다. 이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정직한 사람, 선량한 사람 , 좋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렇게 하라'고 하는데 몸은 `난 싫어'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관절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마음이 하자는 대로 `예' 하고 거기에 이의가 없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어떤 한 60대 되는 소매치기 왕초가 있다고 합시다. 그 왕초가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데 스크린에 소매치기 소년이 어떤 나이 많은 할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려는 장면이 나온다면 그걸 보는 소매치기 왕초는 `요놈의 자식아' 하면서 그 영화 속의 소매치기 소년의 손목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때는 자기가 소매치기 왕초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겁니다.(웃음) 그 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소매치기 소년을 잡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벌써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소매치기의 왕초이니 소매치기 소년쯤이야 용서해 주고도 남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장면이 나오면 심각하게 봅니다. 그 녀석을 나꿔채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적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소리를 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누가 교육합니까? `나는 마음 소학교 다녔소. 나는 마음 중학교 다녔소' 하는 말을 들어 봤습니까? 이것은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법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마음 이상의 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을 하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요? 양심은 바른 것입니다. 대개 관념이 그렇습니다. 양심이 꼬부라졌느냐 반듯하냐 할 때, 양심이 꼬부러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양심은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바르면 얼마나 바르냐? 똑바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려가는 바름이냐, 올라가는 바름이냐, 혹은 수평선을 중심삼은 바름이냐? 이렇듯 바른 것도 다릅니다. 양심은 올라가는 바름입니다.

그러면 올라가는 바름은 뭐냐? 올라가는 각도가 작으면 하는 일도 작습니다. 좋은 일을 하겠으면 하고 말겠으면 말고 하는 식으로 작용 자체도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도가 크면 클수록 그 작용도 커집니다. 양심이 올라가면서 바른 각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강한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양심은 올라가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한두 번 작용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려고 합니다. 양심은 명령할 때 오늘만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잘하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마음이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어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양심은 `이제 이만했으면 남들을 도와 줘야 될 게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즉 양심은 혼자 갖고 살지 말고 좋은 것은 전부다 나눠 주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나누어 주는 데에는 어떻게 나눠 주고 싶으냐? 집안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좋으면 좋을수록 넓고 높고 멀고 깊게 나눠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은 넓고 높고 깊게 주고자 하는 양심을 중심삼은 인격 내용과 결부된 기준을 가졌기 때문에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선한 일을 얼마만큼 하라고 하느냐? 선한 것을 전부다 이룰 때까지 하라고 합니다. 여기 의정부 시민이 얼마나 됩니까? 「8만 명 됩니다」 할 수만 있으면 8만 명 전부를 잘살게 만들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마음은 그렇습니다. 자기의 모양은 초라하더라도 마음만은 자기보다 남을 더 잘살게 해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백만장자가 되어 가지고 내가 하고 싶었던 대로 모든 의정부 시민들을 외적으로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할 때, 양심은 `야,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 자, 너도 같이 잘살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의정부 시민 8만 명뿐만 아니라 삼천만 민족을 다 잘살게 해줘야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응당 그럴 것 같지 않아요? 8만 명밖에 안 되는 이 조그만 의정부시를 위해서 마음이 하자는 대로 했다고 해서 거기에서 보따리 풀고 잠이나 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정부시를 도와줬으면 그 다음에는 `삼천리 반도 삼천만 민족을 도와줘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삼천만 민중이 전부다 나로 말미암아 혜택을 받고 잘살게 됐다면 양심은 이 이상 행복이 없다 하면서 `이젠 낮잠 자고 쉬어도 돼'이렇게 명령하겠어요? 절대 안 한다는 거예요. 쉬려고 하면 `어허 세계를 위해서 하늘땅을 위해서 더 해' 하고 명령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합니다」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양심은 나하고 원수입니다. 폭군이라면 최고의 폭군입니다. 그만했으면 됐지, 여기에서 더 하려면 얼마나 뼛골이 빠지겠느냐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정성을 들이느라 잠 못자고 피땀 흘리며 수고를 했는데도 그 수고를 한꺼번에 집어던지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동네를 위하고 나면 그 동네뿐만 아니라 `삼천리 반도를 위하라'하고, 삼천리 반도를 위하고 나면 또 `세계를 위해서 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30억 인류를 전부 잘살게 했다 하더라도 양심은 `야, 이제 됐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옛날에 왔다 갔던 사람들을 위하라고 합니다. 죽었더라도 그 사람들을 잘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또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잘살고 있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수천만대의 선조로부터 왔다간 수천 억 되는 인류들, 영계에 가 있는 영인들까지도 잘살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못살고 죽으면 한이 맺힌다고 하잖아요. 그러한 맺힌 한까지 풀 수 있으면 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이 못 살면 되겠느냐, 그 기반까지 닦아 놓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양심이라는 것은 종자가 어디서 생겨났고, 뿌리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길래 이러는지 이게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