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어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0권 PDF전문보기

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어야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생애는 3년 공생애로부터 시작됩니다. 그전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라든가 열 두 살에 예루살렘에 갔다 왔다는 약간의 기록은 있습니다만,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거예요. 그것보다도 서른 살이 되기까지 그동안 뭘 했는지, 집안에서는 화목하게 자랐는지,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해 주었는지, 헝제간에 의가 좋았는지, 사돈의 팔촌 까지 예수님을 존경했는지, 그러한 내용은 하나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뚝 잘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역사는 바로 밝혀야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바로 밝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부모가 나라의 역적이라면 역적이라고 밝혀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분의 역사에 대해서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배후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배후가 올바르게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릇되게 되어 있느냐? 과거 역사를 알아야만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올바른 결과로 결하게 될지를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0년 생애노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4복음서라든가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예수님 사후에 사도들이 기록한 3년 공생애노정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하도 작아서 차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데 여섯 시간 반밖에 안 걸립니다. 누가 한쪽 끝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면 다른 한쪽 끝에서 산울림으로 울려서 다 들을 수있을 정도로 좁은 곳입니다.

성경 66권을 대조해 보면 시온산과 예루살렘은 불과 20리 안팎의 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20리 안팎에서 일어난 사실만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야말로 형편없다는 겁니다. 앞집 사람, 뒷집 사람이 누군지 전부다 빤히 알 수 있고 무슨 문제가 벌어지면 일시에 소문이 퍼질 수 있는 그런 지역입니다. 미국 같이 50개 주나 되어 가지고 동쪽에서 서쪽까지 가는데 그 시차가 서너 시간이 되는 지역이라면 모르지만, 그곳은 뭐 엎드리면 코 닿을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3년노정에서 베드로 야고보 등 사도들을 데리고 다니는 데에 있어서, 언제나 친척들을 만날 수 있고 모든 사실을 다 알 수 있는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요셉 가정의 족속들은 한 사람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사촌이나 육촌, 이종 형제들이 있었을 텐데 그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기가 막힌 사실이라는 거예요.

만약 어떤 집에 맏아들이 있다고 하면 그 맏아들이 의붓자식이라 해도 그가 집을 나가 3년 동안 어떠한 뜻을 품고 새로운 일을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그를 따라 다니는데 그것을 본 친척 패거리들이 거기에 하나도 안 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일이나 한다면 모르지만, 뭇사람들로부터 놀라운 추대를 받으며 또 그 배후에 나타난 이적기사라든가 역사에 없었던 놀라운 일을 하고 다니는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친적들이 그렇게도 빤빤하게 모른 척할 수 있어요? 예수님도 친구가 있었을 것인데 도와주는 형제나 친구 한 사람 있었으며, 가정을 중심삼고 누이 동생이나 혹은 이모 등 진정으로 예수를 염려하면서 울고불고 하던 사람이 어느 누구 하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수수께끼라는 겁니다.

여기 서울교회 목사님도 한 분 오셨는데 기독교 믿는 사람들, '목사님' 하면 무조건 우러러보지요? 그저 이름이 좋아서 목사라는 거예요. 만약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따랐더라면 목사 됐겠습니까? 또, 목사가 될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진짜 목사가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한꺼 번에 많은 사람들이 섬기기만 했으면 될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만일 예수님의 친척들이 베드로 야고보보다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예수님이 무식한 사도들을 선택했겠어요? 그 무식한 사도들보다도 명문가 출신인 요셉의 친족들이 그렇게도 못났더란 말입니까? 세례 요한을 보더라도, 그는 당대에 얼마나 잘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까지는 그래도 근본적으로 틀거리가 그만한, 환경에 신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렇게 쫄딱 망하는 따라지 모양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거예요.

오늘날 통일교회는 기성교회가 믿고 있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다만 좀더 헤치고 뿌리를 파가지고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하늘의 뜻이 어떻게 된 연유에서 이러한 사연으로 저끄러졌으며, 또 그러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행로와 결과가 맺어졌느냐 하는 것을 알고서, 과연 그 결과가 천의에 일치 되는 결과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감정하고 비판하여 그것의 책임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