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2권 PDF전문보기

슬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하나님은 기쁨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슬픔의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슬픈 입장에서 출발하여 슬픈 결과를 맺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목전에서 전면적으로 배반하고 추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슬픔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갖춘다 할진대, 슬픔으로 출발하여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었더라도 우리를 대하시는 순간 슬픔을 잊고 기쁨의 결과를 세울 수 있는 입장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그 기쁨의 기준이 상승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복귀가 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을 갖고 대하는 그 자리에 창조적이고 새로운 전진의 역사가 출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반을 닦아 넓히고 그러한 환경을 마련하려는 사람을 중심삼고 섭리의 터전을 넓히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섭리를 승리로 결과지으시려는 하나님의 불가피한 욕구요, 요구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내가 외롭기 때문에 하늘이여, 나에게 복을 주소서. 내가 어려운 길을 가고 있으니 하늘이여, 이 길을 막고 나를 쉬운 길로 인도하소서' 하고 기원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어려운 입장에서 이 시간에도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도리어 하나님께 '당신의 어려움을 나에게 분담시켜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그 크신 하나님의 고통을 위로하는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어떤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었다면 그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슬퍼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은 그 이상의 슬픔을 느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맛본 슬픔보다 못한 슬픔을 겪은 사람이 그 어머니를 위로한다면 그 어머니는 위로받을 수 없지만 자기 이상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 위로하면서 '나도 이런 일을 당해 보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면 손해만 보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할 때에 그 어머니는 거기에서 자기의 슬픈 마음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머니의 다른 아들이 어머니보다 더 슬퍼하면서 '내가 어머니의 슬픔을 대신할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 하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그 어머니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도리어 그 아들을 위로하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러한 입장에서 슬픔을 당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당하시는 슬픔이 얼마나 크겠느냐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하나님께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 권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자기의 형편은 제쳐 두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슬픈 자리에서도 도리어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고생하는 자리에 서 가지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며 있는 정성을 다하고 핍박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거기에서 위로를 받으실 것이며, 당신의 모든 사연을 털어놓으시고 그와 함께하려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의 심정세계 즉, 정적인 세계를 미루어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언제나 슬픈 하나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하나님보다 더 수고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고, 또 우리를 위로하시는 입장에 선 하나님은 슬픔을 잊으시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슬픔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안타까와하며 간접적으로나마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시는 자리에 서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은 바로 하나님께서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슬픔을 잊을 수 있는 한 순간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이란 것은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시간이란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 슬픔이 있으면 그 슬픔을 나로 인해 탕감하시옵소서. 그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슬픔까지도 나로 인하여 탕감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제물되기를 다짐하고 그런 입장을 찾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멀리하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인연을 맺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만 전진할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터전을 갖고 나서는 사람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전진의 일로를 가기 위해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슬픈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슬픈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슬픈 입장에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이나 불만스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라면 천만번 죽더라도 감사할 수 있고, 천만번 다시 회생하더라도 또다시 하늘의 뜻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일대(一代)에 있어서 수십 혹은 수백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나는 하나님을 위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도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싸움터에서만 싸울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범위를 넓혀서 가정적인 싸움터에서 싸워 나가야 됩니다. 내 개인이 과거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붙안고 싸웠으면 또다시 종족을 붙안고 싸우고, 그 다음엔 민족을, 국가를, 세계를 붙안고 싸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탕감의 단계를 넓혀 나가면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분야는 점점 사방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것이요, 그로 인해 우리는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 과거보다도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그 목표가 감소되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자리는 틀림없이 정지하는 자리를 넘어 후퇴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