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의 씨앗으로 나타난 통일교회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9권 PDF전문보기

결실의 씨앗으로 나타난 통일교회

이렇게 보게 될 때에, 그 종교는 어떠한 종교일 것이냐? 끝날에 만민이, 혹은 역사가 필요로 할 수 있는 하나의 결실을 해 가지고 하나의 생명체로 남아질 수 있는 그 터전이라는 것은 만민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있는 소망의 곳이 아니라 전부가 얼굴을 돌리는 자리가 아닐 것이냐, 그런 자리에 하늘이 혹은 인류가 소망할 수 있는 하나의 씨앗이 남아질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러한 종단은 어떤 종단일 것이냐? 그런 종단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어쨌든 그런 종자를 만들려는 운동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계절을 채워 가지고 봄을 맞이하려면 겨울이 가로막는 것입니다. 겨울은 생명의 여력을 전체적으로 침범해 가지고 이것을 제거시키기 위한 힘으로써 부딪쳐 오는 계절입니다. 그런 시련과정을 늠름히 싸워 돌파할 수 있는 주체력을 가진 자체들로서 구성된 것이 아니고는 안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에 있어서의 `통일이다. 통일교회다' 하는 것을 두고 보면, 통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전체를 대표해서 중심 자리에 서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진액을 대표한 입장에 서서 봄절기의 내용을 지녀야 되고, 여름절기의 내용을 지녀야 되고, 가을 절기의 내용을 지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소생기, 장성기, 성숙기의 내용을 다 지닌 자리에서 정상적인 결실을 갖출 수 있는 한씨앗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봄날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사탄을 중심삼고 봄날을 맞았습니다. 악의 터전 위에서 봄날을 맞았고, 여름날을 맞았고, 가을날을 맞았습니다. 그것이 나면서부터 탄식의 환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할진대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남아질 수 있는 씨앗으로서의 인연을 갖추고 나타난 종자가 있다면 그 종자는 나면서부터 기쁨을 맞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회의 기쁨도 다 저버리고 출발하게 될 때 그런 기쁨을 대신 해가지고 설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기쁨의 마음을 중심삼고 보게 될 때,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함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체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출발은 낙망의 출발이 아니라 소생과 기쁨의 내용을 가진 출발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출생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장성기 성숙기의 과정을 거쳐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봄날에는 새로운 싹이 트지만 거기에는 아직 겨울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쌀쌀한 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환경 가운데서 생명을 지니고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여력 앞에 있어서는 환경적으로는 협조적인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땅 밑에서는 온화한 생명의 인연이 발발할 수 있는 뜨거움이, 온기가 생명의 여력을 품고 있어야 됩니다. 제아무리 환경이 모질고 차갑다 하더라도 그 환경을 제거할 수 있는 온기를 지니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명의 힘이 거기에서 소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소생의 힘이라는 것은 그 어떤 환경의 조건보다 약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제압하고 그 모든 어려운 환경에서 생명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통일교회면 통일교회가 그런 책임과 사명을 추구하고 나아가는 종단이라 한다면 지금까지 역사상에 없었던 한 새로운 소생기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출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자라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통일교회는 어떤 종파와도 다른 내용을 가지고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에 있어서 인류의 비운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을 갖고 나올 것이 아니라 출발 당시부터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소생의 기쁨을 찬양하는 데 있어서도 역사시대의 그 어떠한 권위와 어떠한 가치의 내용도 능가하는 자리에서 늠름하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만민이 환영하는 자리에서는 그런 출발의 자리를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사가 결정되는 경각의 자리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슬픔의 경지를 향해서 넘어가는 것보다도 소망의 경지를 향해서 그 경계선을 넘어서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보는 종단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통일교회는 어땠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주위 환경이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자기 부모가, 혹은 사랑하는 처자가, 혹은 사랑하는 그 어떠한 인연이 나를 얽매어 가지고 포위하고 구속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그것을 일시에 끊고 나설 수 있는 태도를 갖고 출발한 것이 아니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 현실에는 없는 세계사적인 사정에 접할 수 있는 내연을 지니고 출발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