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바쳐야 새로운 차원의 승리가 결정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51권 PDF전문보기

생명을 바쳐야 새로운 차원의 승리가 결정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 하나님까지도 얼굴을 돌리시어 캄캄한 어둠이 세 시간 동안 천지를 뒤덮었지만, 그 자리에서 결해지는 사랑의 인연이 비참하였더냐? 아니라구요. 사실 사랑하는 독자가 죽는 자리를 눈을 뜨고 바라보는 부모는 없는 것이 아니예요? 안 그래요? 자식이 죽기 전에 눈을 감고 통곡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죽는 데도 부모를 위해서, 부모의 소원을 위해 죽는다면 그 부모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나서는 바라던 소망의 세계를 붙들고 눈물을 퍼부을 것이 아니냐. 소망의 세계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사랑을 갖고 죽은 아들의 시체를 사랑해 줄 것이 아니냐. 그런 입장에 설 때는 죽어서도 미래의 사랑의 눈물과 사랑의 품에 품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그렇게 죽음길을 간 사람 외에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 중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극히 비참하고 지극히 심각한 자리에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차원 높은 인연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참하였지만, 하나님은 비참한 눈물을 억제하시며 새로운 사랑의 흐름을 딴 방향에서 인연지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세 시간 동안 캄캄한 어둠이 접해졌지만, 그것이 걷히는 시간에 새로운 부활의 천국이 개문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서 통일교회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사람은 나가라구요. 통일교회보다 더 크고 더 높은 것을 위해 죽겠다고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삼천만 국민을 교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의 주권을 완성할 때까지 우리는 가야 되는 것이요,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길에 역사시대의 어떠한 치열한 전투보다도 더 치열하고 더 고독한 길이 가중되더라도 가야 되는 것이요, 죽음이 엇갈리는 길이더라도 가야 되는 것이라고 하며 생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나서서 죽었다 하는 날에는, 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차원의 승리가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한 말은 당연한 말입니다. 진짜 충신은 생명을 바치고 난후에, 진짜 효자는 생명을 바치고 난 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기 전에는 아무리 잘했다고 하더라도... 천년 세월을 다해서, 혹은 자기 생애를 다해서 효도하다가 그냥 죽은 사람하고 일년 동안 효성을 다하다가 생명을 바쳐 죽은 사람하고 누가 더 효자예요? 천년 살다 그냥 죽은 사람보다 일년이지만 생명을 바쳐 효성을 다한 사람이 효자라는 것입니다. 그거 그럴 것 같아요?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죽음길로 내몰아라' 하는 거예요. 그거 사랑의 말이예요, 저주의 말이예요? 무슨 말이예요? '죽음길로 내몰아라! 황천길로 들이 몰아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도 역설적인 교훈이 많이 있어요. 역리적인 교훈이 많다는 거예요. 사리에 맞지 않아요. 뭐,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어요? 보라구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고 했는데, 그의 나라가 어디 있어요? 없다구요. 예수 나라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허황된 말 같다구요. 이루지 못할 소망은 허황된 거라구요. 그렇지요? 소망에는 언제나 허황이 몇 퍼센트 개재되어 싸고 도는 거예요. 허황된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을 소화시켜 가지고 실현시키게 될 때는, 현실화시키게 될 때는 그만큼 승리의 비율, 가치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요건이 다 갖추어진 입장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도 못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했다고 할 때는 표창을 하고... 그렇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