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욕망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51권 PDF전문보기

사랑의 욕망

국가를 사랑한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 이하의 사랑을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 할진 대는, 그것은 사랑의 법도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볼 때, 한 국가면 국가를 대해 사랑하는 사람이 세계를 사랑하려고 할진대는, 국가를 사랑하던 경험과 체휼적인 모든 요인을 그냥 그대로 가지고 그 이상의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사랑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사람은 나라보다도 세계를 찾기를 바라고 세계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가보다도 세계를 더 사랑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이 그 하나님을 사랑 하는 데 있어서 세계를 사랑하던 것을 떼어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있고, 세계를 사랑하던 것을 누룩으로, 터전으로 하여, 세계를 사랑하던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주체로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자리를 찾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세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자리를 찾으실 것이냐, 그렇지 않은 자리를 찾으실 것이냐? 그것은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세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자리를 찾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욕망이 처하는 최후의 종착점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자식을 많이 키워 본 부모는 무엇인지 모르게 사랑의 심정이 넓고 큰 것을 우리가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길러 낸 사람은 악한 원수를 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건 왜? 그만큼 무엇인지 모르지만 넓은 터전에 서 있고, 넓은 법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의 주체자입니다.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사랑한 것을 다 빼놓고 하나님과 나만이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실 것이냐? 나 하나만을 중심삼고 그러하기를 바랄 것이냐? 하나님이 부모라면, 공평한 마음을 가지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공동적인 사랑을 분배시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부모의 입장이 아니겠어요? 이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계를 빼놓고 나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계와 더불어 사랑을 받겠다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 사랑을 받자 하는 것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관념을 떠나 가지고 세계와 더불어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만을 사랑해 주소' 하고 나만이 사랑을 받자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다 이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다. 먼저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먼저 개인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라는 것은 우리 개인이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가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나라에 대한 욕망이요, 그의 나라에 의를 세우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킨 터전 위에서 사랑을 성립시켜야 기쁨이 있는 것인데. 욕망을 다 빼 버리고 소원을 다 빼 버리고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혼자 살고자 하는 것은, 자기 혼자 잘되고자 하는 것은, 잘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사상을 갖고 가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잘되었더라도 저들로 말미암아 내가 잘되었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는 저들과 더불어 망할 수가 없습니다. 저들과 더불어 흥하기를 바라 가지고 내가 흥했다 할 때는, 망하게 되더라도 저들이 망하기 전에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저들과 더불어 망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은 없어진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저들과 더불어 남아 있는 한, 내가 저들과 더불어 같이 있게 된다면 나는 망하지 않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위주한 생활을 표방해 가지고 인륜도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공사(公私)라는 말을 하게 될 때에, 공(公)을 먼저 말하지 사(私)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사공(私公)이라고 하지 않는 다구요. 부(副)가 정(正)일 수는 없다는 거예요. 공(公)이라는 것은 전체를 위하여, 그대들을 위하여 상대권을 인정하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상대권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는 사(私)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상대권은 공(公)이 처하는 곳입니다. 공(公)이 처하는 곳에는 '그대들' 이 있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소원하는 것은 개인적인 소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소원인 것입니다. 전체의 소원을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는 개인의 슬픔을 가지고 좌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잔치가 벌어졌다면. 그 잔치를 중심삼고 환경이 전부 다 기쁨으로 싸여 있는데, 그 가운데 개인의 슬픔이 있다 하여 '나 슬프다' 하며 아무리 야단을 쳐도 그것은 제거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쁜 날을 맞이했거든 전체 사람들의 기쁨에 맞추어 움직여 가지고 자극을 줄 수 있는 주체적 자리에 서게 될 때에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자리에서 그 기쁨을 삭감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고취시키고 자극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영속적인 주체성을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공적인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