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회는 하늘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0권 PDF전문보기

통일교회는 하늘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

뜻이 무엇이냐? 뜻은 내가 사는 길이요, 가정이 사는 길이요, 국가가 사는 길이요, 세계가 사는 길이요,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서 인류하게 되면 역사적인 의미의 인류예요. 과거 현재 미래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도 재미를 보며 살 수 있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프시다면 세상이 재미있을 게 뭐예요?

어제 저녁까지는 뺨을 대고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며 사랑해 주었지만, 지금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인데 그 아들딸이 와서 '엄마, 아빠' 하며 '요 시간도 틀림없이 나를 사랑해 줘요' 하면서 어제같이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면, '그래 해주마' 하며 사랑해 줄 수 있습니까? 갑자기 그럴 수 있어요? 인간 자체도 그렇게 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기 전부터 아버지의 기분이 좋아야만, 좋게 될 수 있는 상대가 나와야만 좋은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면 만나기 전에는 기분이 나빴는데 좋은 상대가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탕감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기분 나쁘게 한 패가 그 아들딸보다 더 가까운 패일 때에는 그 아들딸이 아무리 위로하더라도 위로가 안 되는 겁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만 그 위로하는 패가 기분 나쁘게 한 패 이상이 되게 될 때는 한꺼번에 다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 세계의 승리적이고 보람된 길입니다. 이것이 있기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타락한 인간 조상 아담 해와의 핏줄을 받은 우리 인간은 용서받을 수 없는 패지만, 타락 전 아담 해와 이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길을 가지고서 '하나님, 그 슬픔은 다 잊어 버리소서' 하게 될 때 '어 어'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정 세계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의 뜻이 우리 통일교회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교회이기 때문에 타락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가자는 구체적인 내용이 문제되는 것이예요. 안 그래요? 자,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까지 슬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 같아요?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 슬픔을 무엇으로 위안할 것이냐? '하나님 제가 있으니 슬픔을 위로받으소서' 해가지고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사랑의 심정을 지녀 가지고 '아버지여, 당신은 이러이러한 슬픔을 가지신 아버지이기에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며 눈물을 쑥쑥 흘리면 그것으로 통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백과사전이 필요 없다구요. 성경 66권이 필요 없다구요 그래서 성경은 천국은 무불능통한 자리에서 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알겠어요?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이 사람도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인간이 타락하던 그 순간 슬픔을 느꼈던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더욱 슬퍼할 수 있는 나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슬픔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당신이 이럴 수 있느냐'고 할 수 있는 나의 심정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노아면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수난길을 통하여 배를 지었던 그 수고가 한 순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질 수 있느냐, 그것이 그럴 수 있느냐 하며 노아 할아버지 이상 슬퍼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국경을 초월하여 수많은 나라를 넘나드는 집시의 무리를 끌고 다니는 행각의 노정을 걸었지만 그 가운데, 그 수난의 역사 가운데 하늘의 위안이 있어서 축복해 주었는데, 그 모든 축복이 깨지는 그 자리를 볼 때, 아브라함이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심정, 그를 대하던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가 하는 것을 알아 가지고 그 이상 몸부림칠 수 있는 자기 발견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를 중심삼고 볼 때도 예수의 30년 생애의 삶이 그것으로 끝날 것이었더냐, 그것을 대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슬펐겠느냐 하며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을 내가 어떻게 발견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것을 원할 거라구요. 자기의 죄지은 사연을 중심삼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보다 차원 높은 입장에서 새로운 자극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몸부림에서부터 하늘도 출발하고, 인생도 해결이 벌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부르짖고 나오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