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길은 어떤 길이냐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5권 PDF전문보기

영광의 길은 어떤 길이냐

하나된 그 기준에서는 상하가 엇바뀌어도 그것은 통일입니다. 만일 위가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그것은 아래를 위로 올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내려가는 것은 어머니가 내려간 것을 올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 내려오는 것은 위로 올라가는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잡아당겨 주는 것입니다. 올려 주고 잡아당기고 하며 여기서 돌아가기 때문에 영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혼자 고착된 점에서는 영원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칠판에 쓴 제목이‘참된 영광의 길'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인간이 그리는 최후의 갈 길이 어디냐?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운명길에 놓여 있는데 내가 갈 수 있는 영광의 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 죽음으로 일방이 결정된 그런 운명에 처해서 신음하고 있는 내가 위로부터 하나의 줄이라도 탈 때는, 그 순간은 영광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광된 시간입니다. 이것을 내가 바랐다면 바라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기뻐할 순간이 아니냐. 만약에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런 길이 있다면, 그 줄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울 것이냐? 그것은 바라지 않았던 사람도 기쁠 것이요, 바랐던 사람은 더 기쁠 것이 아니겠느냐. 그 영광의 길은 어떤 것이냐? 신음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부 바라는 길입니다. 전부 다 기쁨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이 아니냐. 그 길을 찾는 순간은 영광된 순간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영광의 순간을 붙드는 데도‘아이쿠 내 손에 힘이 없어’하게 되면 아무리 영광의 길이 왔더라도, 영광의 순간이 찾아왔더라도 영광의 길을 거쳐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줄이 있다면 그 줄을 붙들 뿐만아니라 그 줄에다 목이든 다리든 꽁꽁 얽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얽어매기만 해 가지고 되느냐? 되지 않습니다. 얽어맸더라도 누가 위에서 당겨 줘야 되는데 만일 위에서 당겨 주지 않으면, 옆에서 당겨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함받는 데 있어서 세 사람이 한꺼번에 구함받겠다고 하면, 세 사람 다 망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씩 구함받아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두사람은 협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참으로 이치적인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누구를 중심삼고 한 말입니까? 하나님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까? 삼위일체란 뭘 하기 위한 것이냐? 인간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그 자체를 중심삼고 하늘은 꼭대기에 있고 나는 그 줄을 붙들고 있는데, 하늘이 안 당기게 되면…. 하늘이 꼭대기에만 있어 가지고는 안 되겠다구요. 줄을 걸어 붙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줄을 당겨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자리에 처해 있는 운명을 대신 책임질 사람이 없어 가지고는 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 자리를 전부 책임질 수 있게끔 되어 가지고 전부 다‘내가 끌어올릴 수 있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끌어올리려면 현재의 입장을 책임지고 넘어설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쪽의 희생이 없어 가지고는 한쪽이 올라갈 수 있다?「없다」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한 운명에…. 그럴 수 있는 줄이 있으면 그 줄만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줄 대신 수평선을 중심삼고 하나의 육지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요렇게 올라갔다가 이렇게 떨어지기를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 줄을 붙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다가 쓰러지면 그때 하나님이‘야! 요녀석아 너 제발 망해라’하겠어요? 고생 고생하다가 남편이 쓰러지면 부인이 해주었으면, 부인이 쓰러지면 그 손자가 해주었으면, 그 손자가 쓰러지면 후손이 해주었으면, 후손이 없으면 나라 사람이 해주었으면, 그 나라가 없으면 세계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해주었으면 하실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역사시대의 희망봉입니다. 틀림없이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런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왔다면 그것은 인류의 소망이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그 소식은 복된 소식이 아니냐. 기독교를 중심삼고 그 소리는 복된 소리예요, 망할 소리예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우리 선조도 물론이요. 수천만 대의 인류가 고대하던 메시아가 왔다니 그 얼마나 복된 사실이냐.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라는 말 자체는 죽어도 그 말이 좋은 것이요, 살아도 그 말이 좋은 것입니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말은 망해도 좋고 흥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한국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아이구 좋아 죽겠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보면, 한국 민족이 지지리 망할 민족이 아니면 반대로 지지리 흥할 수 있는 국민이라는 뜻입니다. 한국말을 보면‘아이구! 이 문둥아, 너 어디 있었니, 반가와 죽겠구나’하는데, 좋아 죽겠다니 이게 무슨 말이예요? 좋아 죽겠다니. 왜 듣기만 해도 끔직하게 죽겠다는 말을 붙이고 다니느냐? 이렇게 보면 좋은 것의 이면에는 반드시 나쁜 면이 있다는, 양면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