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들이 걸었던 대표적인 신앙의 표준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오고 나서 얼마나 변화했느냐? 만일에 변화 하지 못했거든 그 과거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과거가 못 되는 거라구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과거를 올바로 갖지 못한 사람의 현재의 자리는 이미 전후가 엇갈린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심각한 문제라구요.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가야 되느냐? 구약시대에 실수한 것을 우리는 바로잡아야 된다 이거예요. 신약시대에 실수한 것을 바로잡아 놓아야 한다 이거예요.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통일교회는 구약, 신약, 이것을 완성 시켜야 할 성약(成約)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 있어서는 아담 해와가 타락했으니 타락한 전통을 바로잡아 놓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한때를 부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만일에 남자면 남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타락했으면 여자라는 것을 부정해야 됩니다. 여자가 그랬으면 남자를 부정해야 됩니다. 절대적인 한계선만큼 부정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늘 앞에 새로이 불리운 여자면 여자, 남자면 남자로서의 올바른 과거의 기준을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원수시해야 합니다. 미련 없이 짤라 버리고 제거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없어 가지고는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가지고 에덴의 사랑으로 본래 이루려 하셨던 본연의 기준을 연상(聯想)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거라구요. 어떠한 미녀와 어떠한 미남이 와서 유인하더라도 완전 부정의 기준을 내 스스로 세워야 됩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예요? 그러지 않고는 타락하여 형성된 혈통적인 이 죄악사를 바로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노아 가정을 두고 볼 때 그는 120년 동안 시종여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한 그날서부터 120년간을 꾸준히….세월이 가면 갈수록 지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가면 갈수록 발전해야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나간 거예요. 나이가 많아지면 힘이 들고, 매일같이 하는 일 가운데 있어서 이것을 습관적인 일로 계속함으로 말미암아 정성이 줄어들 수 있는 입장인데, 힘을 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날이 가면 정성을 더한 것입니다.
어제보다는 나아야 된다 이거예요. 반드시 나아야 된다 이거예요. 결정적인 이런 놀음으로써 120년 동안 아라랏산 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정했으면, 온 세상 인간들도 하늘나라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시종여일해라 이거예요. 120수라는 것은 전체를 대신한 숫자다 이거예요. 일생을 시종여일하게 가야 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자기 아들을 칼로 찔러서 제물로 바치라는 무자비하고 인륜의 도리에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아비의 입장에 섰지만 하늘의 뜻을 위해서는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입장에 섰다구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 모세 역시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다 내버리고, 자기가 미분명하게 될 때는 담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저버리면서도 하늘을 자기 민족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시내산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환경을 다 저버리는 거예요. 60만 대중을 광야에 물아내 놓고 40일 동안 간다온다는 말도 없이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모세의 그 비장한 마음이 어떻겠느냐 이거예요. 담판을 지어야 할 이런 기로(岐路)의 선상(線上)에서 생사의 문제가 절박한 것을 볼 때에 민족의 아우성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이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문제시해 가지고 그 환경을 무시해 버리고 나서는 모세와 같이, 용단 있는 사나이와 같은 그런 길도 가야 된다 이거예요.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가야 할 신앙 노정에 있어서 대표적인 타입, 표준형들로서 역사에 나타났던 인물들이 아니냐.
세례 요한이면 세례 요한이 30평생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혹은 눈이 오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가 바라는 것은, 일념으로서 추구하는 것은 메시아를 만나 가지고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이 문제다 이거예요. 메시아를 만나기 위한 것이 목표다 이거예요.
비를 맞고 고생을 하고 천대를 받는 그 어려운 환경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메시아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취급할 수 있는 당당한 관(觀)을 가지고 산 세례 요한이 아니겠느냐는 거예요. 불평을 하려 했다면 30여 년의 생애를 광야에서 지낼 수 없어요. 그가 광야에서 생활한 것을 생각해 보라구요. 메뚜기를 먹고 석청을 먹고 가죽띠를 띠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구요. 요즘과 같이 양복을 입었겠나요, 구두를 신었겠나요? 틀림없이 왕발(맨발)로 성큼성큼 걸어다녔을 거라구요.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왕발로 다니고 있다구요.
그런 세례 요한은 그 시대에 조롱거리였다구요. 동네방네 다니게 되면 어린아이들까지도 구경거리 났다고 '저 저 저것 봐라' 그랬을 거라구요. 이러니 자기 어머니 아버지, 자기 친척 형제들이 보고서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 어머니 아버지가 '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 우리 사랑하는 세례 요한!’ 이렇게 선전하고 돌아다녔을 것 같아요? 그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했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창피예요. 그걸 형제들이 보면 창피 중에 그런 창피가 어디 있겠어요? 안 그렇겠느냐구요?
이런 인물들을 보면 그 시대의 사회 환경으로부터 추앙받던 인물들이 아니라 전부 다 비소받던 무리들이예요.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그 무엇이 반대하더라도 오시는 메시아는 민족을 초월 하고 세계를 초월한,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의 존재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표준삼고는 문제시 안 한 거예요. 이들은 그런 것을 문제시하지 않는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 아니냐.
또, 예수 같은 사람을 보라구요. 예수가 이 땅에 와 가지고는 이스라엘 민족이 제도화한, 형식화한 유대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딱 잘라 버린 거라구요. '독사의 종자들아' 하며 얼마나 들이쳤나 보라구요. '너와 나와는 한 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도리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깝다고 했어요. 그럴 수밖에요. 그 제도와 형식을 통해 가지고는 하늘나라, 하나님이 원하는 뜻의 자리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는 거예요. 믿지 않는 사람은 모르니까 들어오는 것이 쉽지만, 이론으로 얽어 놓고 또 얽어 놓고 비판하고…. 전부 다 자기 관(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시키고 하나님의 뜻의 자리에 들어가기란 지옥에서 천국 가기보다 더 힘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관점에서 독사의 종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라구요. 이것을 볼 때 체면불구하고 자기 어머니로부터 자기 스승할 것 없이 모든 주권자로부터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부정한 거라구요. 전부 다 부정한 거예요. 반대한다고 해서…. 거기에 동조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구요. 초월한 자리에서 죽어 가면서 그를 위하여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리에서 죽어갔다 이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