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역사의 정상코스를 밟아 가야 될 통일교인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52권 PDF전문보기

복귀역사의 정상코스를 밟아 가야 될 통일교인

그런 자리에 가 가지고 기뻐하게 될 때의 그 기쁨은 자기 일신의 개인적인 기쁨만도 아니요, 자기 가정의 기쁨만도 아니요, 혹은 자기 민족의 기쁨만도 아니요, 일개 국가의 기쁨, 혹은 세계 인류의 기쁨만도 아닙니다. 이 기쁜 자리에는 천하가 다 들어가고, 천하가 다 들어가는 동시에 창조주가 계신다면 창조주인 주님께서도 다 이 자리에 들어와 기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이상을 부르짖는 자의 최고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틀림없는 결론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 결론에다가 사람을 집어넣어 보자구요. 역사적인 어떤 위인이 있다면 그 어떤 위인도 역시 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면 앞으로 보충해야 할 입장에 서 있다고 봐야 됩니다. 석가 같은 양반도, 공자 같은 양반도, 예수 같은 양반도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내용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어느 누가 풍부히 가졌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가지고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이냐,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혜아려 볼 때, 그 내용의 가치를 논하는 데 있어서 평면상으로 나타나는 것만을 가지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내적인 내용의 모든 것을 지녀 가지고 평을 해야 완전한 평이 되겠기 때문에 반드시…. 내적인 분야를 붙들고 나올 때 여기에는 내적 사정이 많을 거예요. 내적 사람이 있으면 내적 사정이 있을 거예요. 내적 사정이 있으면 내적 소원이 있을 거예요. 내적 소원이 있으면 내적 심정이 있을 거예요. 사정과 소원과 심정이 내적으로 있을 것입니다. 또, 외적인 모든 것도 역시 부합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에 있어서 반드시 그런 이념적인 중심 존재가 있다 할진대는 그 이념은 반드시 내적인 사정과 외적인 사정을 모두 통할 수 있는 것이어야 돼요. 내적인 소원과 외적인 소원, 내적인 심정과 외적인 심정이 통하여 그 가운데에 걸려 있는 모든 만유의 존재가 다 기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결론적인 권내에서 비로소 승리했다는 그런 사람이 이 천지간에 나온다 할진대는 그때서부터 우주가 수습될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때서부터 평화의 시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평화의 개인으로부터 평화의 가정, 평화의 사회, 평화의 인류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구세주가 목표하는 목적지는 어떤 곳일 것이냐? 그 목적지가 바로 이제 말한 그런 곳입니다. 수많은 역사적인 위인과 혹은 역사적인 철인과 역사적인 도인들이 많이 왔다 갔지만서도 그건 가외의 한 분자밖에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산을 바라볼 때 하나의 큰 상상봉이 있으면 그 상상봉을 위하여…. 산맥이 뻗쳐 있으면 뻗쳐 있는 산맥에도 봉우리가 많은 거예요. 이 봉우리만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그 뒤에 딸린 원산맥을 바라볼 수 없게 될 때에는 자기가 대하고 있는 그 산봉우리가 제일인 줄 알아요.

마찬가지로, 산의 최고의 상상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산과 수많은 맥을 가져 가지고 이것들을 규합하고 전체를 수습해야 돼요. 그래야 최후에 하나의 구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사상도 역시 그렇다는 거예요.

개개인의 모양의 형태와 사상은 다 마찬가지의 사상과 형태를 가지고 있으되 이것이 전체적인 하나의 기준으로서의…. 거기에서 내적 외적인 모든 가치를 지녀 통할 수 있어 가지고…. 그 내적 가치가 이루어져 기뻐하게 될 때는 아무 산이면 산 권내에 있는 전체가 기쁘지 그 산봉 우리, 최고의 상상봉만 기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귀섭리의 역사도 그러하고 메시아가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섭리하는 목적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디를 향하여, 어디를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냐? 어디를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냐? 이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사람 들이다! 이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데는 어떠한 길을 따라가야 될 것이냐? 수많은 산맥 산맥, 골짜기 골짜기를 찾아가야 할 사람도 물론 있을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정상 코스를 밟아서 가야 합니다. 상상봉에 도달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되겠다 이거예요. 이래서 그 정상 코스를 밟아 가자니 오늘날 수많은 길을 다 제쳐놓고 도(道)라는 이름의 길을 뒤 집어쓰고 그 길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몰려든 패들이 오늘날 통일신도란 것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제일 좋고, 제일 안전하고, 제일 무난하고, 제일 가기에 알맞는 길은 많지 않다는 거예요. 제일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볼 때에 여기에서 제일 좋다는 길이라는 것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예요.

그 길을 아는 사람에게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있더라도 그 길들은 전부 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그런 목적지를 향하여 걷고 있는 사람은 과거에 알던 길들은 전부 다 포기해 버려야 돼요. 어느누구든지 그런 사람은 이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설명도 필요 없이 자인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오늘날 우리 통일이라는 명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가 보고 와 보고 다 해봐야…. 고생도 덜하고 노력도 덜하고 수고도 덜했지만 가려진 결과에 있어서 좋은 것만이 거기에 반비례하여 나타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대중 앞에 다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길만, 그런 곳만, 그런 방향만 제시하게 될 때는 반드시 시일의 차가 있을망정 통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