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하라는 개념은 투입하라는 것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78권 PDF전문보기

위하라는 개념은 투입하라는 것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데는 움직이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창조주요,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들이 요구하는 무슨 지식이라든가 권력, 돈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 나를 위하라 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습니다. 이 우주가 존속하기 전에 하나님이 창조했다 하는 것은 없는 가운데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 전의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에게는 `나를 위하라' 할 수 있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라'는 개념은 무엇이겠느냐? 그 개념이 있었다면 그 개념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사랑을 위하여 `나를 위하라'고 하는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또 위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될 때 그것은 무슨 개념이겠느냐? 돈을 위한 것도 아니요, 권력을 위한 것도 아니요, 지식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을 위해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동기적 입장에 선 것이 하나님이 아니었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러기에 사랑의 존재를 짓기 위해서는 내적인 자기의 인격을 중심삼고 내적인 기준을 닮아날 수 있는 사랑을 전수해야 됩니다. 몸과 같은 외적인 기준을 닮아날 수 있는 사랑을 전수해야 돼요. 그러니 사랑을 투입해야 하는 놀음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창조는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대상을 위하여 투입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 첫출발의 개념은 뭐냐? 위해서 모든 것을 지었다는 겁니다. 위하는 개념입니다. 투입하는 개념입니다. 완전 투입이예요. 완전 투입해 가지고 대상이 완성된 자리에 서게 되면 그 투입된 것이 다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그렇잖아요? 어떤 파이프가 있다면 거기에 피스톤 같은 것으로 밀게 되면 그 자체가 반작용에 의해서 밀리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이 완전히 투입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완성되게 될 때에는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돌아올 때는 어떻게 되느냐? 이 외적인 세계, 역학세계에서는 입력은 출력보다 크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는 입력보다는 출력이 더 커요.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사랑을 하나 뿌리면 그것이 0.88이 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을 하나 심어 놓으면 그것이 1점, 2점, 3점으로 불어납니다. 거기에 정성된 내용을 갖추면 갖출수록 그것은 사방을 커버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평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구형이 되는 거예요. 평면적 기준이 딱 짜여진 거기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면 평면적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작용하는 결과는 점점 커지게 되어 구형이 형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법도를 활용하는 데는 이상권이 형성된다는 결론을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