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종교생활을 하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256권 PDF전문보기

살아 있는 종교생활을 하라

여러분이 참부모를 사랑해요, 참부모가 여러분을 사랑해요? 어느 쪽이에요?「저희들이 참부모님을 사랑합니다.」여러분들이 더 참부모를 생각해요?「예.」통일교회에 들어온 지 몇 년이 되었어요? 몇 년 되었어요?「10년입니다.」10년, 20년, 30년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참아들딸을 바라면서 온 것이 몇 년 되었다고 생각해요? 몇천만 년이라구요, 몇천만 년. 그 참아들딸을 찾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몇천만 년의 역사를 죽음의 경지를 넘고 넘고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일평생 받들고 받들며, 따르고 따르면서 봉사하더라도 하나님의 그 심정의 상대적 입장에 설 수가 없다구요. 조건적인 상대는 될 수 있겠지만, 평등한 상대적인 자리에는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거예요. 사람이 갈 수 없는 자리, 할 수 없는 자리에 서서 봉사를 하고 잊어버리는 입장에 서서, 그러고도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쓱 일으켜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의 태도를 취하게 되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찾아와서 품어 주는 거라구요. 그런 체휼이 필요합니다.

밤중에 혼자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 같은 데 갈 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으면 자기의 몸에서 빛이 난다구요. 손을 보면 손에서 빛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품어 주시면 자기가 살아가는 동안에 기적 같은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난다구요. 그러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알겠어요?「예.」그런 인연의 근본에서부터 연결되어서 나온 것이 참부모의 기준이에요. 주체가 그런 인연의 내용을 가졌다고 한다면 상대는 그 인연의 내용에 평등적인 입장은 못 되더라도 조건적인 내용이라도 가지지 못하면 하나님과 참부모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생명을 넘어서 남기고 갈 수 있는 조건을 하나라도 가짐으로써 그것이 나일론실같이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거예요. 나일론실이에요, 실. 나일론 줄이 아니라구요. 나일론 실 같은 것이라도 한 가닥 연결됨으로써 최후에 하나님이 부르면 그것을 따라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일론실을 연결하고 싶어요, 나일론줄을 연결하고 싶어요?「나일론 줄을 연결하고 싶습니다.」줄은 많은 실들이 꼬아져서 만들어진다구요. 하나 둘, 그런 조건들을 많이 가짐으로써 하나의 실이 얇더라도 줄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얼마를 헌금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상 헌금할 돈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로 안 돌아오는 거라구요. 알겠어요?「예.」헌금하고 잊어버리면, 그 이상의 돈이 찾아옵니다. 얼마라도 계속 들어온다구요.

선생님은 그런 경험을 잘한다구요. 아들딸이 병이 났다 할 경우에는 말이에요, 쓱 동네를 도는 거예요. 그러한 입장에서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가 없는지 찾는다구요. 그러다가 추울 때 동네 가운데 아들딸을 품고 구걸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전부 다 꺼내서 주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픈 아들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탕감한다는 생각으로 돈을 주고 돌아오면 그 병이 낫는 거라구요. 그런 신비한 생활의 환경을 주변에 남기고 갈 수 있다는 데에 종교생활의 위대함이 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 종교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경지를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그런 생활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어요? 그런 것을 생각해서 불평하지 말라고 하는 거라구요, 불평. 불평하지 말라구요. 비판하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불평을 많이 했지요? 저 남자는 뭐 어떻다, 저 여자는 뭐 어떻다, 에리카와는 뭐 에리(襟;옷깃)를 세운 여자라서 대단하다, 후지이는 어떻다, 선생님은 어떻다, 선생님의 얼굴은 저렇기 때문에 욕심이 많고 사정을 모른다든가, 뭐 언제든지 고생 고생 고생 고생만 하라고 하는 고생의 왕이요, 고생의 부모라든가 하는 등, 온갖 비판을 하고 온갖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불평, 비판하는 데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구요. 오히려 불평당하고 비판받는 데에 틀림없이 하나님이 동정하시어 보호의 울타리를 세워 주시는 거예요. 알겠어요?「예.」불만, 불평을 하는 데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불평하는 소리를 듣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의 보호권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비판하고 불평하는 자리에 설 거예요, 비판을 당하고 불평을 듣는 자리에 설 거예요?「당하는 자리에 서겠습니다.」두번째라구요.

교회에서 주인이 되는 사람은 묵묵히 자기의 책임을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전부 다 싫다고 하고 도망을 가더라도,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더라도 자기가 묵묵히 책임을 지고 해 나가게 되면 결국에는 주인이 되는 거예요, 주인. 주인이 되는 거라구요. 한 번 불평하면 불평하기 전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두 번 하면 그만큼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 번 하면 더 멀어집니다. 세 번 이상 하게 되면 본래의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런 논리가 성립된다구요. 알겠어요?「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