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위하는 법도를 세운 이유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성약인의 길

③ 위하는 법도를 세운 이유

우리가 생각하기를, 사랑이니 이상이니 행복이니 평화니 하는 말은 혼자로서는 성립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상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리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바라는 이상과 행복과 평화는 홀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행복과 평화를 완결지을 수 있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혼자 사랑해서는 무엇 하며, 하나님 혼자서 이상해서는 뭣 합니까? 반드시 상대적인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이러한 요건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75-315, 1975.1.16)

지혜의 왕이시고 전체의 중심이신 하나님이 참다운 사랑이나, 참다운 이상이나, 참다운 행복이나, 참다운 평화의 기원을 주체와 대상, 이 양자 사이의 어디에 두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가 계신 반면 대상이 있는데, 주체를 위하는 길과 대상을 위하는 길, 이 두 길 가운데 이상의 요건을 어디에다 두느냐 하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이상, 참된 사랑, 참된 평화에 있어서 주체를 중심으로 하고, 대상이 주체를 위하는 데 이상적 기원을 둘 것이냐, 대상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가 대상을 위하는 데 이상적 기원을 둘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신 하나님은 그 이상적 기원을 주체 앞에 대상이 위하라고 하는 입장에 세운다면, 하나님이 그러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도 자기가 어떠한 대상을 지닐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립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 될 수 있고 평화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그 길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은 위해서 사는 존재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사랑은 위하는 데서부터, 참된 이상도 위하는 데서부터, 참된 평화, 참된 행복도 위하는 자리에서 성립되지, 위하는 자리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근본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몰랐습니다. (75-318, 1975.1.16)

남자 여자가 태어난 것은, 남자는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위해 태어났고, 여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나기를 자기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나지 않은데도 자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 나`라는 이 사상을 깨뜨려 버려야 됩니다. 이것만 깨뜨려 버리면 통일의 세계는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61-266, 1972.9.1)

자기의 가치를 자기에게서 추구하기보다는 상대에게서, 즉 상대적 기준에서 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심정의 터전은 상대권을 가졌기 때문에 가나 오나 그는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59-201, 1972.7.16)

하나님은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우선 여러분들에게 묻겠는데, 만일 여러분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진정으로 생명을 다하고 희생을 다하면서 100퍼센트 은사를 베푼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본심이 그 은사를 갚는데 50퍼센트는 주머니에 집어넣고 50퍼센트만 갚고 싶습니까, 아니면 있는 대로 다 갚고 싶습니까? 우리의 본심이 어떻게 작용해요? 누구나 더 갚고 싶어하는 것이 본심입니다.

주는 대로 진정 사랑하는 가운데서 준 것을 안다면 100퍼센트 이상을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100퍼센트가 110퍼센트로 돌아오고 그 110퍼센트 돌아온 것은 또 그쪽에서 진정으로 주었기 때문에 120퍼센트로 갚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개념이 설정된다는 것입니다. 영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며,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발전과 번창이 생기는 것입니다. (73-326, 1974.8.10)

이상과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이런 것이 자기의 것으로 자기에게 나타나는 줄 아는 것, 이것이 큰 오해라는 겁니다. 사랑과 이상은 어디에서 오느냐? 대상에게서 옵니다. 대상에게서 오기 때문에 위하는 법도를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왕 되신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결과를 아시기 때문에 그런 법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3-326, 1974.8.10)

영원이라는 개념, 이것은 자기를 위하는 데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운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밀어 주고 끌어 주는 상대적 방향이 크면 클수록 빨리 도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되는 하나님이 위해서 존재하는 법도를 세운 것은 영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세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5-322, 1975.1.16)

우리들 가운데 남에게 주관(主管)받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 더욱이 식자층에 있는 고명한 분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제까지의 인간들이 위해서 존재하는 그 앞에 주관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영계의 조직을 보면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주 만유의 존재 가운데 위해 존재하는 중심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지배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천년만년 지배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이상적 통일권이 여기에 성립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5-323, 1975.1.16)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도 귀한 사랑과 이상을 찾으려면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이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히 그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아들이려니 가장 위하는 자리가 아니고는 안 되므로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75-323, 1975.1.16)

사랑은 혼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나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대상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내가 머리를 숙이고 대상을 위해야 되는 것입니다. `위하여 살라!`고 하는 천리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극히 고귀한 것이 나에게로 찾아오는데, 그것을 받으려니 높이고 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하는 철학`을 이루어야 사랑받는 것입니다. (143-278, 1986.3.20)

참사랑은 주고 잊어버리고 또 주는 사랑입니다. 거짓사랑은 주고 보태서 장사하는 사랑이요, 주었으니 너는 그 이상 갚아라,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탄 사랑입니다. (138-174, 1986.1.21)

우리의 본향(本鄕)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이요, 위해서 나고,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것이 우리 본향(本鄕)의 이상적 구조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향에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역사 과정에 수많은 종교를 세워가지고 훈련시켜 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종교가 온유·겸손해야 되며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영계에 돌아가야 할 인간들에게 영계의 법도가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지상생활 과정에서 그 영계에 알맞도록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보다 차원 높은 희생을 강조하고 봉사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평소의 생활을 통해 그 세계에 일치시키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75-321, 1975.1.16)

흔히 세상에서 말하기를, 아! 인생이 무엇이냐고 하는데 인생관(人生觀), 국가관(國家觀), 세계관(世界觀)의 확립, 그 다음엔 우주관(宇宙觀)에 대한 확립, 더 나아가서는 신관(神觀)의 확립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계통적 단계와 질서를 어디에다 둘 것이며, 그 차원적 계열(次元的 系列)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는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 (75-324, 1975.1.16)

그러나 위해 존재한다는 이 원칙에 입각해서 보게 될 때에 가장 가치 있는 인생관은 내가 전 인류를 위해 있고, 전세계를 위해 있고, 국가를 위해 있고, 사회를 위해 있고, 가정을 위해 있고, 아내를 위해 있고, 자녀를 위해 있다는 입장에서 행복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이상의 인생관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75-324, 1975.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