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구원의 기점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3권 PDF전문보기

인류 구원의 기점

현대사회에서 청소년 문제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그 동기의 80퍼센트 90퍼센트 100퍼센트 이상이 정서적인 문제에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잘 갖지 못한 데에서, 형제를 잘 갖지 못한 데에서, 남녀관계에서 결여된 사정들이 원인이 되어 그런 결과를 자아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이 모든 병폐를 시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 역시 가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세계의 역사 가운데는 혁명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런 혁명의 결과로써 세계를 움직인 사실이 많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최후의 문제는 참다운 가정을 이루기 위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한 중심이 지구상에 현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세계의 창건, 새로운 역사적인 이상의 출발이 나타나야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여러분 각자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올바른 가정의 기원을 갖지 못한 사람이 간다고 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갔더라도 안정된 목적점을 찾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가정으로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생 행로인 것입니다.

본향을 추구해 가는 인간의 힘이 역사 전체와 모든 환경에 영향을 미칠수 있고 행복의 터전을 이루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인간의 힘의 기반이 되는 가정이 어디에 이루어질 것이냐? 오늘날 도라든가 종교는 사회에 공적인 이익을 주기 전에 가정에 공익이 되는 기틀을 먼저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그 종교가 사회에 공익이 되는 업적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가정의 기틀이 틀어지게 될때는 사회의 터전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최초의 기점은 어디일 것이냐? 어떠한 문명을 자랑하는 특정한 국가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사회의 어떠한 조직이 이상적인 조직이라 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어떠한 개인을 중심으로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냐? 이 모든 것을 초월할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가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그러한 가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은 그런 가정의 문을 통과한 자격을 갖추어 승리자의 팻말을 들고 세계를 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주의와 사상을 대할 수 있는 개체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찾는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오늘날 인간들이 `아! 지금까지 우리 가정은 행복하다'고 해도 그 가정의 행복을 미래에까지 보장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평화스러운 가정이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죽음을 통고 받을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과 평화를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는 신념을 갖춘 그 가정을 이루어 어떤 슬픈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터전을 우리는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개체가 그만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사람들이 이루는 가정도 그러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에서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 먼저 죽는다 해도 그것이 불행의 요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러한 가정을 찾기를 바라시고 수많은 종교도 그러한 가정을 찾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 불교의 비구니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종교가 지향하는 목적이 틀렸다는 것인가. 틀렸다고 한다면 그런 종교가 지금까지 수고해 나온 터전, 그 종교의 배후에서 역사해 오신 하나님 자체도 다 거부당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한때에 참된 가정이 나와야 되기 때문에 그 가정을 맞기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불교와 천주교에서는 독신을 강조하느냐?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행복의 터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위의 어떠한 종교도 행복의 터전이 무엇이라고 제시해 주지도 않았고, 가정의 기틀을 중심삼은 계획도 없었거니와 그 가정 자체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런 가정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독신을 강조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간들이 순결하고 올바른 가정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사람이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상적인 가정과 완전히 하나 되어야 할 가정을 추구해 왔는데, 그것이 성경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인가? 세상의 원수 가운데 누가 제일 큰 원수인가? 돈 몇십억원을 손해보게 만든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손해 본 몇백 배의 돈이 생기면 그를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보다 더한 정도의 원수가 있다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수 중의 원수는 무엇이냐? 심정의 적대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용서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원수 가운데 원수는 무엇이냐? 사랑의 원수입니다. 즉 정적인 문제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 원수는 용서할 수도 없고, 이 원수를 용서하면 천도에 어긋납니다. 이것을 용서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하는데 하나님에게 무슨 원수가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원수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절대적인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상대가 이원적인 입장에 서게 될 때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상대적인 입장에서 상대성을 띠고 나타나게 되면 이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도저히 용납받을 수 없는 문제가 무엇이냐? 돈도 아니요, 국가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두고 볼 때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두 나라는 서로가 원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동지적 입장으로 묶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이익을 중심삼고 원수가 되었다 하더라도 공동적인 사랑의 인연으로 용서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다수의 사람이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일본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찔러 죽였거나, 자기의 남편을 죽였다고 할 때는 아무리 국교가 정상화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에는 원수의 나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개인도 그렇지만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유린하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는 법을 세워서 평화의 기점을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기점은 절대적으로 단 하나입니다. 이것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기점이 둘이 되는 날에는 이상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