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를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셨겠는가도 생각해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8권 PDF전문보기

노아를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셨겠는가도 생각해야

이런 등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런 환경을 바랐는데 그것이 노아의 아내로부터 깨져 나갈 때 어떠했겠어요? 다음에는 자식으로부터 깨져 나갈 때 어떠했겠어요? 아내가 노아에게 바가지를 긁었겠어요. 안 긁었겠어요? 아들딸이 효도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효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 하나 물어 보게. 노아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녁에 집에 돌아와 가지고 밥을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밥 먹는 시간에 천대받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바가지를 긁었다면 그 시간에 긁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무슨 밥을 먹고 다녔겠어요? 밥을 해주었다면 보리밥을 해뒀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먼저 해 먹고…. 그래도 고집은 있어서 아낙네가 바가지를 긁을 때 가만히 있었겠어요? '이거 왜 이래…' 이러며 실쭉거리고…. 곧은 성격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 옷이나 잘 해 입혔을 것 같아요? 그 동네에서 누더기와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노아의 신세를 여러분이 연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걸 바라보는 아내는 노아에게 '저놈의 영감 그래도 싸지'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노아의 아들은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 없었겠지만, 노아의 형이 있었다면 노아의 목덜미를 잡고 '야 이놈아' 하고 있는 말 없는 말을 하면서, 별의별 행동을 다 하면서 막으려 했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있었다면 매일같이 길에 지켜 서서 그런 야단을 벌였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랬겠나. 안 그랬겠나?

그런 사연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분의 생활 주변을 두고 보면 이해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그렇게 시킨 하나님의 마음은 편안했겠느냐? 아닙니다. 그런 문제를 당할적마다 소원하던 아내의 기대가 깨져 나가고, 자식의 기대가 깨져 나가고, 가정의 기대가 깨져 나갔습니다. 여기에 끌려갈 수 밖에 없고, 제재 받을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선 노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천리(天理)를 두고 약속했던 엄청난 규약이 깨지느냐, 안 깨지느냐 하는 아슬아슬한 입장에서 노아만이라도 이것을 끌고 가서 맞춰 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겠어요? '내가 왜 이걸 했을까' 그랬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때마다 '노아야, 노아야, 그래서는 안 된다. 몇 년 지나 왔으니 몇 년 남았다' 하면서 계산해 가지고 '50년이 지나갔으니 이제 70년이 남지 않았느냐? 그걸 못 참아? 그랬겠어요? 그렇게 위로해 가면서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나님이 못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남자들도 소위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약속을 했으므로 '노아야, 나는 천지의 대주재되는 하나님인데 120년 후에는 틀림없이 이러이러한 일을 할 것이니 너는 배를 준비해라. 120년간 어떤 수난의 길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가지고 배를 지어라' 할때 '예' 하고 약속하고 나서 그런 환경에서 머리 속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를 생각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그런 생각을 안 했다면 그거 거짓말입니다.

노아가 일하러 나가는 시간이 평상시에 일곱시라면 그 시간에 나가야할 노아가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여덟시를 지나 아홉시를 지나고 열시를 지나고 열 한시를 지나 마침내 하루를 빠졌다고 합시다. 빠진 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만약에 하루를 빼먹는 날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하나님이 '야, 너 참 잘했다. 응당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는구나. 잘한다. 조금 더 생각을 그렇게 하지' 그랬겠어요? 노아가 빼먹는 하루가 하나님에게는 천년 만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그 하루 때문에 억천만세의 성사(聖事)가 중단될 수도 있는 억울한 하루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루의 억울함이 하늘땅의 억울함으로 남아질 수 있는 입장인데 하나님이 기쁘셨겠어요? 어떠했을 것 같아요? 기가 막힌 사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노아를 존경하고, 찬양하고, 찬사하는 말도 필요하지만 그 노아를 바라보며 나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고독하셨고, 얼마나 억울하셨겠느냐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것을 생각하는 무리가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벌도 줄 수 있고 복도 줄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고서 어떻게 노아에게 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벌을 줄 수도 있고, 생사화복을 주관할 수도 있는 그런 주체적인 절대권을 가진 분이기에 인간 세상의 비참한 고빗길을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인간을 그 고통의 자리에서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선두에 서서 고통을 받고 화도 받는 것이지, 옆에서 구경하는 분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저 복을 주는 것이냐? 천만에요. 복은 그냥 굴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데 있어서는 수천, 수만의 길을 가려 가지고 다시 찾아와 수습하지 않고는 복을 줄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연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이런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기에 이러한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이 우리 인류와 더불어 누구보다도 고통을 당해 나왔습니다. 세계적인 대참사가 있고, 혹은 대전쟁으로 인해 비참하게 피 흘리는 자리가 있으면 누구보다 가슴을 조이고, 누구보다 눈물을 흘리며, 누구보다 안타까와하는 분,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혼란의 시대, 혹은 그러한 시대를 결정짓는 결전장을 맞이해 가지고 신음하는 세상의 어느 군왕보다도, 또 고난의 자리에선 어느 군왕보다도 신음과 고통을 느끼는 분, 이렇게 책임을 지고 몸부림치는 분이 절대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