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는 길을 가르치는 통일교회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3권 PDF전문보기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는 길을 가르치는 통일교회

지금 통일교회 교인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패들은 '선생님이 오늘 또 무슨 말씀하실 것이다. 고생하라 할 것이다! 하지만 말만 그렇다'고 합니다. (웃음) 충신의 가르침은 별것이 아니라구요. 그저 보는 눈에는 침을 놓으려고 하고, 전부 다 달리는 말에 브레이크를 걸려고 하고, 자고 있는 사람을 목침으로 대가리를 까려고 하고…. 그게 충신의 가르침이라구요. 그렇다는 겁니다. 전부가 반대입니다. 나 좋다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들여다보면 볼수록 정떨어질 것밖에 없지, 정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하나님을 위한 충신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는 길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속아서 나가든 강제로 끌려 나가든 나가게 되면, 나가지 않은 사람보다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망하더라도 세상 사람보다 나은 자리에서 망합니다. 죽더라도 영계에 가게 되면 높은 자리에 갑니다. 그거라구요. 그러므로 통일교회에 와서 좋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예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올 필요도 없어요. 왔거들랑 보따리 싸 가지고 뒤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러면서도 떨어질 수 없고, 안 갈 수도 없는 길이라면, 그것은 지독한 길입니다. 지독한 길인데 그것이 나쁜 길이 아닙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결과가 나오면 멋진 것입니다. 그 길이 얼마나 긴 역사의 거리를 갖고 있느냐? 만약 천년 동안 걸어왔다면, 천년 이상의 가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혹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비참한 역사를 거슬러서 지금까지 걸어왔다면, 인류역사에 없는 빛나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한 가치의 길이라면 벼룩이 놀라 뛰는 것 모양 그렇게 뛰어서 되겠느냐 이거예요. 뛰더라도 몇십 년은 뛸 수 있어야 합니다. 산이라면 산을 넘어가더라도 평지에서 뛰쳐내려가는 것이 좋아요. 뛰쳐 올라가다가 점점점점 기진맥진해서 팍 쓰러지는 것이 좋아요? 그것은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저 산정을 넘고 내려가는 데도…. 여러분들이 산에 가보게 되면, 노루라는 놈은 언덕바지를 치닫는 데는 이게 참 명수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노루라는 놈은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넘어설 때에는 한번 싹 돌아보는 거예요. (웃음) 그것이 틀렸다구요. 거기서 전부 다 총에 맞아 쓰러지고 한다구요. 올라가는 데만 선수인 줄 알았더니…. 노루는 뭐 뒷다리가 길어 가지고 내려갈 때 언덕바지는 못 뛴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못 뛰긴 왜 못 뛰어? 그건 그 나름대로 뛰는 거예요. 뛰는 걸 보면 뒷다리를 이렇게(흉내내심) 넓히고 뛰는 겁니다. 보라구요. 내려갈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뒷다리를 이렇게 넓히고 앞다리는 모아서 뜁니다. 그러니까 뛸 수 있다구요. 그냥 뛰게 되면 이렇게 꺼꾸로 되거든요. 그러니까 다 살게 마련이라구요. (웃음)

자 그러면, 고개를 올라갈 때에 멋지게 치달아 올라가고, 또 넘어가서 내려갈 때도 달려 내려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겠어요. 그저 할수없어서 '아이고 나는 됐소' 하며 꺼꾸로 가다가 쭉 넘어지는 것을 좋아하겠어요? 어떤 것을 원하겠어요? 하나님도 별거 없지요 뭐,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대개는 그렇습니다.

겨울에 말이예요. 객사하는 사람들이 그래요. 산을 넘고 내려오다가 아주 모진 바람을 막지 못하여 옴폭한 데 양지 바른 곳에 내려오면 '아 이거 참 따뜻한 자리구나! 좀 쉬어 가자' 이럽니다. 싹 앉으면 노곤해 가지고 가물가물 잠이 들어서 얼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길에서는 안일을 용서하지 않아요. 언제나 초긴장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경기마당에 선 선수와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