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투입하면서도 기뻐하는 것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5권 PDF전문보기

창조는 투입하면서도 기뻐하는 것

그러면 왜 그래야 되느냐? 왜 남을 위해서 있어야 되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근본 문제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왜 그런 인간들을 만들었고, 이런 인간사회가 형성되는 것을 바라고 있느냐? 왜 그러냐 하는 문제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라구요. 그것에 대해서 알려면 근본 문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중심존재가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느냐 하는 문제에 들어가게 돼요. 왜 사람을 지었느냐? 사람을 지을 때 하나님을 위해서 지었느냐, 아니면 다른 누구를 위해서 지었느냐? 오늘날 기성교회에서는 ‘아,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 지으신 세계를 위해서 지었지' 라고 말합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그럴는지 모르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될 수 없고, 이상적인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천지 만물을 누구를 위해서 지었느냐? 하나님을 위해서도 짓고,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지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무리 훌륭하시고, 아무리 절대자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명사, 흑은 좋다는 명사는 혼자 있어 가지고 설정되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갖춘 자리에 있어야 좋고 행복하다는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도 혼자 가만히 있어 보라구요. 그게 행복할까. 노래를 잘 부르는 음악가가 있어서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합시다. 그게 행복한가?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무엇 무엇이 그렇소?’하고 물으면 여러분이 대답을 해야 모든 것이 처리되어 나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인연되어 나갑니다. 그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좋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혼자 있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보라구요. 여러분이 성경을 보게 되면 천지창조한 것을 간단히 말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야,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나왔다는 거예요. ‘별이 생겨라’하면 별이 생겨났고, ‘이 지구성이 생겨나라 하면 생겨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무한한 질서와 법도를 따라 가지고, 전진적인 원칙을 계승시켜 가지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발전시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이 모든 만물을 지어 놓고 만물의 정수로서 갖다 집약시켜 놓은 것이 소위 성경에서 말하는 아담과 해와, 인류의 조상입니다.

이것을 벌여 놓으면 하나는 남자 성품으로 된 세계가 쭉 달려 있고, 하나는 여성 성품으로 된 세계가 쭉 달려 있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뭐냐 하면 평면적인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뭐냐? 종적인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여러분들간에 ‘그 사람은 마음이 바르다‘고 하지요? 마음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을 갖고 바르다고 하느냐? 바른 기준이 있어야 될 게 아니냐. 그 기준이 어디예요? 그 기준이 내 마음이예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여기 서울에서 대구까지 몇리냐 할 때 7백리라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즉 서울에서부터 대구까지라 하더라도 그 원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 데나 기준삼고 자기 마음대로 재서는 안 되는 거예요. 기준이 있어 가지고 거기서부터 재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다’할 때도, 마음이 바른 것을 무엇에 기준하는 거예요. 자기 할아버지가 기준인가? 할머니가 기준인가? 자기 선생이 기준인가?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출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출발하게 된 기준이 있어 가지고 과정을 거쳐 목적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준은 수평선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양심이 곧다‘고 그러죠? 곧다. 물론 그 곧다는 것은 평면적으로는 수평선이 되겠지만, 이것은 수직적인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곧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90도 각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360도의 중심에 딱 결정되어야 됩니다. 이 각도가 틀려지면 중심이 이동돼요. 알겠어요? 이것이 90도가 되어 가지고 사방이 90도, 360도가 되지 않고 조금만 틀리게 되면 중심이 이동됩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고착된 중심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사방이 똑같은 90도를 갖추어야만 됩니다. 그래야만 그 자리가 영원불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을 표준하고 말하느냐 하면, 인간 관계에 있어서 횡적으로,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는 거예요. 또, 곧다 하는 것은 무엇 가지고 말하느냐?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곧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왜 지었느냐?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돼요. 지었다는 사실은, 뭘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힘을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힘의 투입이라구요. 그렇잖아요? 힘을 투입한 것입니다. 힘의 투입이라는 것은 자체의 소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힘을 잔뜩 뽑아냈는데 그것이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소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밥을 먹고 힘드는 노동을 하게 되면 빨리 배가 고프지요? 빨리 피곤해지지요? 왜? 힘을 투입하면 주체면 주체 자신에 있어서는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에 손해를 보아 가면서 좋아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플러스되는 데서 좋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것은 우시기 위해서, 슬프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좋으시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러면 플러스를 언제 찾느냐? 언제 그것을 찾아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여기에는 피조물의 완성이라는 표준이 있는 거예요. ‘이때까지 투입하면 그때부터 돌아온다' 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장사를 해도 그렇잖아요? ‘이만큼 노력하면 그때에는 이(利)가 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내가 공부를 하는 데, 이만큼의 한계점까지 열심을 다해서 그것만 완전히 통과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나에게 이익이 돌아올 것이다' 공부도 그러면서 하잖아요? 무슨 뭐 고시니 뭣이니 하는 것들도 다…. 뭘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노력하여 그 한계점을 밀고 넘어가게 될 때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으셨다면 왜 지으셨느냐는 거예요.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힘을 투입한 게 아니냐? 투입했습니다. 자기 자체를 소모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중심삼고 투입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투입해 가지고 완성이 되는 날에는 그것이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이 되는 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는 돌아옵니다. 이런 원칙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데 있어서 백을 투입했는데 백보다 적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하나님은 창조 위업을 계속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을 투입했으면 돌아오는 데에는 백 열, 이백, 삼백 이렇게 보다 더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무한한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그 창조는 투입하면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아오는 데에 어떻게 돌아와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에, 보다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 가치의 것으로 돌아올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느냐, 그것이 돌아올 때 기쁠 수 있는 것이 뭐냐?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