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목표를 중심삼고 똑바로 하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75권 PDF전문보기

모든 것을 목표를 중심삼고 똑바로 하라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의 가정은 죄 없는 가정입니까? 죄 없는 신랑 각시가 될 수 있는 죄 없는 아들딸로 태어났어요? 태어났어요? 그렇게 못 태어났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해야 됩니다. 탕감을 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제물을 드려야 됩니다.

제물을 드리는 데는 어떻게 드리느냐?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믿음의 기대니 실체기대니 하는 말을 배우지요? 그 믿음의 기대가 뭐냐? 제물과 제물 드리는 사람이 하나되는 거라구요. 완전한 제물은 완전한 사람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제물이 피를 흘리게 되면, 피를 흘려야 할 인간이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代贖)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거예요.

자, 이런 역사를 하고 있어요. 이것을 우리 원리로 말하면, 사람 관계에서는 가인 아벨 관계라는 거예요. 우리가 상하관계에 있어서, 전후관계에 있어서, 혹은 좌우관계에 있어서 이 원칙을 기준으로 해 가지고 일치 되게 될 때는 하늘로 가는 것이요, 이것이 잘 맞지 않을 때는 사탄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이것은 망상적인 것이 아니예요. 현실적 생활무대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내가 길을 간다 할 때, 공적인 아벨적 길을 중심삼고 가느냐 가인적 길을 중심삼고 가느냐, 둘 중의 하나예요. 그렇지요? 여러분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 공적인 말이냐, 사적인 말이냐? 악한 말이냐, 선한 말이냐? 가인적이냐, 아벨적이냐? 행동이나 말이나 모두 구별되게 마련입니다. 만일 타락이 없었더라면 만상이 선으로 귀결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만상은 악에 귀결되든가, 선에 귀결되든가 하게 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가라는 거예요. 왼쪽으로 가면 사탄편이라구요. 그렇지요? 그렇게 돼 있다구요.

아가씨들을 보면 말이예요. '내가 요렇게 얌전하게 생겼으니 남자들이 보면 혹하겠지' 해 가지고 눈을 까박까박하며 옆을 훔쳐 보고 하는 것은 여우예요, 여우. 요것은 못 써요. 그게 선한 여자예요? 그런 여자는 틀림 없이 사탄이 빼 가요. 빼 가야 됩니다. 안 빼 가면 안 된다구요. 그렇지만 훤해 가지고 이 동네 저 동네 어디 가든지 전부 화목하게 하고, 말한마디를 해도 좋을 수 있는 말만 하는 사람은 선한 아가씨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런 것은 알지요? 선한 아가씨가 되면, 선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또, 선한 어머니가 되면 선한 아들딸을 키워 놓는 거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은 선하니까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그 가정은 흥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관권 내에 들어가면 흥하게 마련이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그래서 우리 통일교인들에게 선할 수 있는 길을 가자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겁니다. 모든 감각까지, 눈도 똑바로 보아라 이거예요. 눈을 뜨고 똑바로 보라는 거예요. 목표를 중심삼고 똑바로 봐야 되는 거라구요. 조금만 옆으로 가게 되면 이미 틀렸다는 거예요. 눈이 왔다갔다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눈을 똑바로 뜨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 똑바로 뜨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해요? 눈을 똑바로 뜨라고 말하지요? '야, 야, 눈 똑바로 뜨고 주의해라!' 이런 말 하지요? 그 똑바르다는 것은 무엇을 보고 말하는 거예요? 거기에는 표준이 있습니다, 표준. 양심을 중심삼고, 어떤 목적을 중심삼고 어긋나지 않게 잘 맞추라는 거예요. 보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듣는 데 있어서도 좋게 될 수도 있고, 나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말하는 데에 있어서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그렇지요? 울던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고, 웃던 사람을 울게 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요? 두 가지라구요. 전부가 다 마찬가지예요.

손도 마찬가지라구요. 손을 움직이는 데도 좋게 할 수도 있고 나쁘게 할 수도 있다 이거예요. 생각도 그래요. 모든 일체가 타락권 내에서는 두가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편을 통하게 되면 하늘로 가는 것이요, 사탄편을 통하면 사탄편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육적인 면을 위주로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면, 내적인 면을 위주로 해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육적인 것은 마이너스요, 영적인 것은 플러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플러스와 마이너스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 앞에 가까우냐 하면, 마이너스보다는 플러스가 더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플러스 기준, 양심의 마음은 상대적 입장에서 마이너스 기준이 되어 가지고 이것이 따라서 하나될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하느냐 비양심적으로 하느냐 하는 것을 문제삼지요? 이것은 하나님을 따라가느냐 안 따라가느냐 하는 문제와 같습니다. 양심적이냐 비양심적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가느냐 안 따라가느냐 하는 말과 같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녹음이 잠시 끊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