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하여 존재하는 자리는 곧 이상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자리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75권 PDF전문보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리는 곧 이상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자리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그 몇가지 요건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본심을 헤아려 볼 때, 나를 위하여 진정으로 생명을 다한 어떤 분 앞에 신세를 진 사실이 있다면, 여러분의 본심(本心)은 그걸 갚는 데 있어서 백 퍼센트의 신세를 졌으면 한 50퍼센트는 포켓에 집어넣고 한 50퍼센트만 갚으라고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백 퍼센트 이상을 갚으라고 하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 본심은 확실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백 퍼센트 이상을 갚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A라는 사람 앞에 B라는 사람이 백 퍼센트의 신세를 끼쳤다면 B는 그걸 갚는데 백 퍼센트 이상으로 돌려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A는 백 퍼센트 이상으로 돌려준 B에 대해서 보다 퍼센테이지(percentage)를 높여서 갚아 주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주고 받는 데 있어서, 그 주고 받는 도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많아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개념이 설정된다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개념, 이것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운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밀어 주고 끌어 주는 이런 상대적 방향이 크면 클수록 빨리 도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위하라는 법도를 세운 것은 영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원칙을 아시기 때문에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원의 개념이 성립됨과 동시에 그렇게 되면 영원히 발전하며 영원히 번창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전진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발전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어야만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예를 들어 어느 한 가정에 열 식구가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서 제일 꼬마 동생이 그 열 식구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그 가정 전체를 위해서 살게 된다면 나이 어린 동생이지만 부모도 그를 내세우게 되고 형제도 그를 내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날이 가면 갈수록 가정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 동생은 자동적으로 그 집안의 중심존재로 등장 한다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중심존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서 만우주의 중심존재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을 닮은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나이 어린 동생 이라도, 아무리 작은 아들일지라도 그는 틀림없이 그의 가계(家系)를 중심삼고 중심적인 자리에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을 미처몰랐습니다.

위해서 사는 거기에서 나 스스로가 후퇴되는 것이 아니라 위하면 위할 수록 그 사람은 중심존재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은 하나님이 중심존재로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런 자리에서만이 이상적 통일, 완전 통일을 성사(成事)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남한테 주관받는 것을 죽어도 못 참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우기나 고명하신 식자층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위해서 존재하는 그분 앞에 주관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계(靈界)의 조직을 보게 되면 천지의 대주재(大主宰) 되시는 그 하나님은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존재 가운데 위해서 존재하는 중심존재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 지배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지…. 천년 만년 지배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이러한 이상적 통일권이 이런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은, 오늘날 여러분이 '사랑은 내 사랑이다. 이상은 내이상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상이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랑과 이상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느냐 하면, 오로지 대상, 대상이 없어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히 그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아들이려면 가장 위하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것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오늘 저녁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기억해 주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아! 인생이 무엇이냐,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에게는 인생관의 확립, 국가관의 확립, 세계관의 확립, 더 나아가서는 우주관의 확립, 신관(神觀)의 확립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겁니다. 계통적 단계의 질서를 어디에다 둘것이며 그 차원적 계열(次元的系列)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