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이 세계적인 축복을 하려고 세운 역사적 존재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54권 PDF전문보기

우리는 하나님이 세계적인 축복을 하려고 세운 역사적 존재

오늘날 이 역사도상에서 복귀섭리를 해 나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인 한 개인을 찾기 위해서 역사적인 투쟁을 해왔습니다. 역사적인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또 역사적인 투쟁을 해왔습니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가정이나 어느 사회나 어느 국가나 어느 세계 어느 주의를 막론하고, 그 주의가 평면적으로 나타났고 시대적 현상으로 나타났지만 인연과 동기에 있어서는 역사성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하나님이 노아 같은 양반 한 분을 세워서 '120년 후에 내가 천지를 심판하겠다'고 약속하게 될 때는 그 개인을 부른 것이로되 역사적인 시련과 역사적인 고통과 역사적인 환란 도상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120년 기간은 어떤 기간이냐 하면, 세계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고 혹은 죽음길을 가는 도상에서, 선을 따라 나가는 데 있어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배반하기 쉬운 자리에서 120년 동안 하나님이 노아에 대해서 명령한 것을 노아가 행동하여 지켜 나온 시기였습니다.

만일 노아가 80년 동안만 수고했더라면 이 뜻은 미성사(未成事)입니다. 100년 동안만 수고했다 하더라도 미성사입니다. 119년 성사하고 '아, 하나님이고 뭣이고 나는 모르겠다' 하고 후퇴했다면 미성사로 끝날을 것입니다. 그러나 120년 동안 꾸준히…. 그는 벌써 하나님이 작정한 120년이라는 기간에 있어서 길이가 길면 길수록 거기에 대동하고 포함되어 있는 시련과 고통과 역경이 얼마나 큰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그 마음 가운데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온 세계 만민은 악한 시련 도상에서 다 포로가 되었지만 나는 악한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가는 길을 가로막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에 포로가 되는 패자가 되지 않겠다'는 철두철미한 신념의 기반 위에서 스스로 실체적인 행동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는 데 있어서 그것이 하루의 생활로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120년 이후에 남아질 수 있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의가 노아에게 없었으면 그는 가다가 망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노아 자신이 이것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면…. 누가 재촉하여 '어찌하여 당신이 약속된 기간을 방심하느냐'고 충고해 줄 수 있는 부인이라든가 자식이 있었으면 노아는 행복한 아버지요 남편이 됐을 것입니다. 120년 동안 남이 알지 못하는 천적인 명을 받아 가지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노아의 처나 자식들은 협조를 못 했습니다. 그럴 적마다 노아는 환경의 십자가가 크면 클수록, 외적인 고충이 크면 클수록, 안팎의 시련이 크면 클수록 붙들고 늘어졌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아는 언제나 '내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놀음을 하지만 내 개인으로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려고 할 때는 열 번 백 번 천만 번 낙심할 수 있는 자리요, 도리어 지긋지긋한 생활 터전인 것을 느끼는 노아는 자신이 홀로 이 일을 해 나간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생각을 가졌느냐? '나는 혼자 하되,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하는 것이요, 혼자 하되 1600년 동안 애달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선한 사람을 불러 나온 과정에서 협조한 선한 선조들과 같이 동반해 싸운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역사적인 과제를 여기서 만들고, 역사적인 인연을 여기서 만들고, 천적인 인연이 자기로 말미암아 빚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외적인 시련에 부딪치는 그것보다도, 외적으로 나타나는 그 가치보다도 내적으로 인연된 가치를 더 철저히 생각하기 때문에, 이 둘을 비교해 볼 때 내적 인연이 크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비교하는 능력을 가지고 비교해 보니 이것이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노아는 120년 동안 싸워 나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도 그렇고, 가정의 생활도…. 야곱을 중심삼고 볼 때에 야곱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가정을 구하기 위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겁니다.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21년 동안 하란 땅에 가서 라반의 수하(手下)에 있으면서 모진 압제를 받고 모진 수모를 받아 가면서 하나님이 축복한 축복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과 내가 당하는 시련과 바꿀소냐! 이 길은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같이 가신다. 내가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그것을 받드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은 나와 같이하신다' 하는 신념이 환경에 머물러 있는 모든 핍박과 시련보다 더욱 가치가 크다는 것을 야곱이 느꼈기 때문에 하란 땅에 들어가 21년 동안의 수난의 길을 갈 수 있었고, 그 결과 축복을 받아 가지고 돌아온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가서 4백 년간 고역을 당하게 될 때에 그 4백 년간의 고역보다도 가나안 복지, 하늘이 축복한 땅, 아브라함ㆍ이삭ㆍ야곱을 통하여 약속한 철두철미한 이스라엘 선민권을 이 천지간에 빼앗아 갈 자가 없다, 아무리 시련이 크더라도 이 축복을 생각하고, 이 축복의 뜻을 이루려는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을 아는 그 마음이 시련보다 더 컸고, 더 무서운 힘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어마어마한 사지(死地) 가운데서 새로이 단결하여 나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개인을 두고도 그러했고, 가정을 두고도 그러했고, 민족을 두고도 그러했고, 오늘날 세계적인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 혹은 민주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개인을 선별해서 축복하기 위해서는 아무 덕도 없는 사람, 공로도 없는 사람을 끌어다가 개인적으로 축복해 주는 법이 없습니다. 개인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만 닦아서는 축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에서 승리하고 가정적인 기반을 닦아 가정적인 출발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돼야 됩니다. 자기의 책임에다가 플러스해서 가정을 구할 수 있는 책임을 한 사람이라야 개인적인 축복을 해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개인적으로 축복을 받으면 못 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축복받게 될 때, 그가 축복받고자 하는 그 욕망보다도 가정을 축복받게 하기 위한 욕망이 더 불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세워서 하나님은 개인적인 축복을 해줬습니다.

또, 가정적인 축복은 민족적인 축복의 기반을 닦아 놓고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적인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7족을 멸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또, 세계적인 발판을 닦기 위해서는 그 원수들을 대비하여 싸워 나갈 수 있는 국가적인 기반의 터전을 마련해 놓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국가적인 터전을 마련해 놓고 민족적인 해방의 문을 열어 놓을 줄을 몰랐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이 애급 땅에서 나오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아니예요. 애급 땅에서 나와 가지고 이스라엘 건국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몰랐기 때문에 망했다는 거예요.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가 예수 이름으로써 일체가 됨으로 말미암아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2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포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해서 천국이 되는 게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하늘땅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아야만 전세계적인 기독교인의 승리의 터전을 닦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축복을 개인으로부터 가정을 거쳐 점점 발전시켜 나가서 고차적인 위치로 끌어올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니 더 고차적인 욕망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개인적인 축복, 가정ㆍ국가ㆍ세계적인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역사를 미루어 봐서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