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중심삼은 세계적 노정을 떠나는 과정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211권 PDF전문보기

미국을 중심삼은 세계적 노정을 떠나는 과정

그렇기 때문에 통일가의 모든 축복가정들은, 이제는 국가적 기준이 아니라 세계적 기준으로 날아가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1968년부터 3년 반 하면 1971년까지 나가요. 그래서 선생님이 1971년에 미국에 가는데 그날이 1971년 12월 18일이예요. 그 미국에 상륙해 가지고 이제는 미국을 중심삼고, 한국에서 국가적인 기독교가 나를 반대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땅에서는 안돼요. 세계적 판도인 미국에 가 가지고 미국 기독교의 환영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혈혈단신으로 혼자 가 가지고 전부 다 3년 동안 기반을 닦은 거예요. 1971년, 1972년, 1973년까지 싸워 가지고 1974년 크리스마스 전날, 24일날 돌아올 때 미국 조야의 모든 기성교회의 뭐 난다 긴다 하는 사람, 시장으로부터 뭐라고 할까…. 내가 시민권 표창장 받은 것이 1천 장 이상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것 다 전시해 놓으면 문총재의 공적이 얼마나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졌다는 것을 알 거라구요. 그거 보고 재판할 때 재판장이 놀라자빠진 거예요. 이런 공신을 재판하고 있다는 사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문총재가 안 가진 이름이 없습니다. 각 도시, 이름난 도시의 시민권을 다 갖고 있어요. 명예 해군 제독 이름, 제너럴(general) 이름을 다 갖고 있어요. 안 가진 거 없어요. 박사는 뭐 수두룩하고…. 그러니 잘난 남자요, 못난 남자요? 아시아인이 미국 천지에 와 가지고 기독교문화권의 꼭대기를 밟고 다니면서 전체 기독교의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카터 대통령이 주지사 할 때까지 그 사람한테서도 시민권을 받았거든요. 이놈의 자식,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 나하고 원수가 되었지만 말이에요, 대통령은 모르고는 놀음 못 하니까 원수가 되는 거지.

이래 가지고 기독교 전체, 메디슨 스퀘어 가든 같은 데로부터 전부 다 이런 대환영을 받은 거예요. 한국의 기독교가 반대하는 것을 세계에서 환영받음으로 말미암아 탕감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탕감해서 한국에 돌아와 가지고 그 다음에 정부 대 기독교, 미국이 환영할 수 있는 정부 대 기독교를 꺾어 놓아야 됩니다. 꺾어 놓아야 돼요.

이렇게 해서 1974년에 돌아오자마자…. 국제기동대가 오는 거예요. 2세들이 오는 거예요, 2세. 그렇지요? 전세계 서양국가의 난다 긴다 하는 나라들의 2세를 데려다가 부산서부터 올라온 것입니다. 부산 작전, 그다음에 대구 작전, 대전 작전, 서울 작전을 한 겁니다. 기성교회가 단결해 가지고 통일교회 극성맞다고 할 때 우리는 체육관 얻어 가지고 8대 도시에서 격돌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여의도 광장에서 2백만 대중집회까지 하니까 공화당이 나가자빠지고 야단이 벌어졌던 거예요. 박정희는 문총재가 나라 말아 먹는다고 야단이 벌어졌다구요. 그때 길전식이라고 사무총장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요전에도 승마 문제 때문에 우리 디어 파크 승마장에 왔다가 갔지만서도 말이에요. 그때 내가 `이놈의 영감! 옛날에 박정희하고 네가 나를 때려잡으려고 했지?' 했더니, `헤헤헤! 그때는 할 수 없이 그랬지요.' 그러고 있더라구요. 그때 거기에 사무총장하고, 그다음에 비서실장 한 녀석이 와 가지고 나한테 문초하던 것이 생각나요.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말이에요. 별의별 수모를 다 겪었어요. 결국에는 안기부하고 정부하고 하나 돼 가지고 기독교를 쳐 버린 겁니다. 알겠어요? 정부가 나한테 말려들었어요. 그때 일화 사건이 있었지요? 일화 사건 이것도 전부 카터 정부하고 다 관계된 거였다구요.

그러한 싸움을 거쳐 가지고 기독교와 전부 다….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되어 가지고 예수를 잡아 죽이던 것과는 반대로 통일교 문선생과 미국과 한국 나라가 딱 하나 되었어요. 이래 가지고 기독교를 쳐 버렸어요. 싸움은 다 끝난 거예요, 그때. 이래 가지고 승리의 패권을 쥔 것입니다. 그때가 6월 7일이구만. 박정희 대통령한테 40장에 해당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어요. `당신은 이런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뜻을 대신해서 이렇게 이렇게 가야 한다는 지시를 내가 하는데, 만약에 아무 날까지 답변이 없게 되면 나는 미국으로 떠날 것이다.' 한 거예요. 그러니까 21일 만에―그 날이 6월 7일이지요?―21일을 기다리다가 6월 28일에 미국으로 떠나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이듬해 1976년 9월 18일 워싱턴 대회를 끝내자 모택동은 땅으로 들어간 것이야. 나는 `아시아에 있어서의 패권자는 꺼져 가는 거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소련이다 해서…. 그때 누군가요? 이렇게 하던 것이 이제는 고르바초프시대에 내가 만나는 단계까지 들어왔지만…. 이런 싸움을 거쳐 나가야 돼요.

그래서 기독교문화권을 중심삼은 판도 위에서 통일교회가 유대교와 로마가 하나 되어야 했던 것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로마 같은 자리에 섰고 한국이 이스라엘 나라와 같은 입장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같은 반대받는 이 모든 전부를, 유대교와 로마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되어 가지고 예수를 죽이던 것을 꺾어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문총재와 정부와 미국이 하나 되어 가지고 기독교를 내미는 거예요. 이 승리의 판도를 세웠기 때문에, 한국에서 탕감조건을 잃어버린 것을 세계적 기반 위에서 찾았기 때문에, 비로소 미국을 중심삼고 국권을 중심삼은 투쟁노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