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모의 사랑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참사랑

3) 부모의 사랑

① 부모의 사랑은 본질의 사랑이다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실현체요, 투입체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의 연장체입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상의 구현체입니다. 자식을 낳아서 사랑해 본 사람들은 알 겁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이는 내 사랑의 실체요, 생명의 연장체요, 이상의 구현체다. 제2의 나다.`라고 하는 겁니다.

자식은 사랑과 생명과 이상적 기반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는 그 자식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보면 볼수록 생명이 약동하고, 보면 볼수록 이상적인 상대로 등장되는 것입니다. (69-79, 1973.10.20)

부모가 변할 수 있어요? 부모의 사랑을 혁명하는 것은 역사시대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혁명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혁명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은 영원히 존속해야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 그러한 사랑의 주체 되는 부모가 나를 절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유일적으로 필요로 하고, 불변적으로 필요로 하고, 영원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74-19, 1974.11.10)

자식은 왜 부모를 그리워해요? 거기에 나의 사랑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137-141, 1986.1.1)

부모의 사랑을 왜 존중시하느냐? 보답을 바라지 않고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결과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다 행복하다는 겁니다. 주는 것으로써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받는 것으로써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습니다. 왜 복이 있느냐? 하나님편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6-36, 1971.7.18)

부모가 자식에 대해 하는 사랑은 그냥 그대로 생활적인 인연만을 통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뼛골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인 것입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끊으려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부모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과 생명의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부모에게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32-15, 1970.6.14)

참사랑은 무엇이냐? 위하는 사랑인데 주고는 그냥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준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어 주어도 지치질 않습니다. 70이 된 아들보고 `얘야! 차 조심해라.`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고, 몇십 년 동안 그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하더라도 싫증나거나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부모가 이렇거늘 하물며 본질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받을 때 지칠 리가 있겠습니까? (남북통일-379)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권한을 가지고 언제나 당당한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자식이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변하지 않는 사랑의 주인입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이 천태만태로 변해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자식을 위하는 마음만은 변함없습니다. 때문에 변하지 않는 부모의 사랑이 귀한 것입니다. (59-298, 1972.7.30)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뼛골이 녹아나도록 고생을 하지만 힘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피와 살을 깎아주고 그 값어치가 얼마인지 장부에 치부해 둡니까? 안 합니다. 오히려 몽땅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39-335, 1971.1.16)

부자관계는 어떤 것이냐? 사랑을 중심삼고 무슨 관계겠느냐? 부자관계는 부모의 사랑이 원인이면 그 자식은 사랑의 열매요 결실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결실과 원인이 동떨어진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출발을 본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원인인데 그 사랑 가운데 내가 결실로 나타났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부모님이 현재 사랑하는 자리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나`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더불어 일체화한 원인과 결과의 자리를 대등하게 갖고 태어난 것이 부자의 관계에 있어서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127-13, 1983.5.1)

부자관계는 종적인 면을 대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관계의 사랑은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역사상에도 그렇잖아요? 부부의 사랑은 횡적인 면의 인연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갖춘 겁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없고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145-274, 1986.5.25)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를 대하는 기쁨은 그야말로 세계를 대표한 기쁨이 되어야 되고,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을 대하는 기쁨은 세계를 대표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부자의 관계는 그야말로 우주의 근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본이 거기에서부터 싹틀 것이고, 슬픔이 시작된다면 그 이상의 슬픈 자리가 없다는 것을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62-18, 1972.9.10)

부자의 관계는 뭘 두고 말하는 거예요? 이것은 핏줄이 연결된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말 가운데는 사랑이 개재돼 있고 핏줄이 개재돼 있다는 것입니다. 직계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한몸이 돼야 됩니다. 핏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전통을 이어받은 생명을 지니는 겁니다. 무엇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142-267, 1986.3.13)

내가 어디서부터 태어났느냐? 나는 부모의 사랑이 지극히 꽃피는 자리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꽃이 피는 데는 아름답게 피고, 아름답게 필 뿐만이 아니라 향기가 풍기고, 그 향기는 어머니 아버지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고 만우주도 좋아하는, 이상적인 꽃으로 필 수 있는 그런 가운데에서 내가 태어났다 이겁니다.

우주를 종합한 남자요, 여자로 태어난 그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의 꽃을 피우는 그 자리에, 기쁨의 자리에서 하나의 씨로 심어진 것이 자녀인 것입니다. (83-162, 1976.2.8)

나는 누구냐? 부모의 사랑의 출발 근원에 동참한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한 곳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원인적인 부모의 사랑과 결과적인 내 생명의 사랑의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일신(父子一身)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빼놓고는 일신이나 일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복중에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내가 사랑의 본질로 말미암아 복중에 잉태된 그 시간에서부터 부모의 사랑과 모든 관심이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에서 생명의 인연을 이어받아가지고, 사랑을 받으면서 커가지고 상대를 맞을 수 있는 때가 되면 상대를 취하는 겁니다. (127-14, 1983.5.1)

부자의 관계는 어떤 무엇으로도 깰 수 없습니다. 원자탄으로도 깰 수 없습니다. 절대로 깰 수 없고, 헤어질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관계입니다. (21-69, 1968.9.9)

부모와 자녀의 인연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내 사랑과 내 생명의 주체성을 가진 것이 자녀이기 때문에, 이걸 끊으면 나를 부정하고 내 생명을 부정하는 자리에 서게 되므로, 사랑의 결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다 하는 논리를 찾을 수 있는 겁니다. (83-163, 1976.2.8)

부처끼리 살면서 아무리 재미있게 사랑한다 해도 자식이 없는 부부가 행복한 부부예요, 자식이 있는 부부가 행복한 부부예요? 자식이 없는 것은 미완성품입니다. 미완성 부부라는 겁니다. 그런가요, 안 그런가요? (92-220, 1977.4.17)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칠 법이 없습니다. 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보호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안고 좋아하는 그 자리는 이 우주의 법이 공격할 수 없고 보호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몰랐습니다. (130-152, 1984.1.8)

자식이 병자가 되어 있고 병신이 되어 있을 때에는 높고 깊은 부모의 심정은 그 병신 자식에게로 흐르는 게 원칙입니다. 그게 틀렸어요? 그런 불구자의 심정은 계곡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꼭대기의 큰 자리와 같습니다. 그러한 부모의 심정이 꼭대기로부터 그 깊은 골짜기로 흘러갑니다. (147-165, 1986.9.7)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품에는 나쁜 것이 없습니다. 옷이 누더기면 누더기일수록,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것이 눈물의 깊은 골짜기를 파내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173-263, 1988.2.21)

여러분, 애기가 똥 싸는 걸 부끄러워한다면 어떻게 되겠나요? 똥을 싸놓고 오줌을 싸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머니가 똥 치우는 것 보고 벌쩍벌쩍 웃고 있습니다. 그거 얼마나 순진해요. 그것은 사랑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랑에서는 추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품 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자식이 똥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환경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본연의 심정을 통해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20-209, 1968.6.9)

부모의 마음은 주고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하고도 덜 사랑한 것이 있지 않겠나 하여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고 나서 섭섭하고 안된 마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과 통하는 본질에 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출발의 전통적 동기입니다. (60-84, 1972.8.6)

부모가 이혼하는 것은 칼로 자식을 절반으로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공법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를 거역하는 부모는 어디를 가든지 화를 받고 불행이 따르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7-38, 1980.1.20)

아기가 배가 고파오면 어머니의 젖이 불어납니다. 젖이 불어가지고 아파오면 안 조이는 데가 없습니다. 배고파하는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기분이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불었던 젖이 줄어들면 어머니는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건 어머니가 아니고는 모릅니다. 또 아기가 쪽쪽 빨아 먹으면서 젖을 만지는 걸 볼 때는 사랑이 듬뿍 우러나는 것입니다. (187-100, 1989.1.6)

자식을 가진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 중에 누구를 죽음의 자리에 내놓겠느냐고 묻게 되면, 그 어머니가 진짜 자식을 사랑한다면 남편을 죽음의 자리에 내놓으면 내놓았지 자식은 안 내놓겠다고 하는 겁니다. 남편들이 들으면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그거 뭐 자식이야 죽으면 또 낳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부가조건이고, 원칙을 따지고 들어가 순서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부부라는 것은 횡적이요, 맨 나중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사랑의 역사가 그렇다구요, 사랑의 역사가. (48-214, 1971.9.19)

본연의 사랑이 도대체 뭐냐?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그게 사랑입니다. 자기 생명을 넘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본래 이 우주가 창조된 것은 생명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부합될 수 있는 생명이지, 생명에 사랑이 부합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생명을 희생해서, 생명을 넘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의 사랑이요, 우주와 통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32-153, 1984.5.31)

연어의 일생을 보면, 연어는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그런데도 알을 배기 위해서 수놈 암놈이 그저 하나 되어…. 그거 보면 죽을 날을 정한 사형수의 입장에서 부부가 사랑하는 이상의 사랑을 하지 않느냐 이겁니다. 암놈이 알을 낳게 되면 수놈은 땅을 파서 보호해 줍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한 쌍입니다. 그리고 알을 낳게 되면 죽는 겁니다. 죽어가는 암놈 수놈들의 여러 가지 모양을 볼 때 참으로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어미의 몸은 새끼들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걸 보면 새끼가 얼마나 중요한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최고의 것이요, 새끼가 최고의 것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표본으로 연어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론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연어의 일생은 참 놀라운 인간의 교재입니다. (128-260, 1983.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