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역사성을 지닐 수 있는 일관된 사상 체제를 요구한다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3권 PDF전문보기

하나의 역사성을 지닐 수 있는 일관된 사상 체제를 요구한다

마음의 속성은 지적 방향과 의적 방향과 정적 방향이 통일적으로 하나가 되어 가지고 '야, 잘 판단했다. 잘했다! 야, 됐구나' 할 수 있는 그것을 위해서 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하냐?표준과 일치될 수 있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일치되면 어떻게 되느냐?영원한 주체와 영원한 대상으로 그 상대가 결정됩니다. 거기에서 영원히 주고받음으 로써 느껴지는 기쁨은 영원히 주고받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억천만금을 주더라도, 억조만세의 수많은 인류를 투입해서라도 찾을 수 없던 보람 있는 가치의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 가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이 자기를 후퇴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난이 극하면 극할수록 그것이 앞으로 성공으로 결실될 수 있는 것이 목전에 점점 접근해 온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람 있는 전징(前徵)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타나는 결과는, 전징은 기쁨과 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바라는 것이 그게 아니냐?그래서 기쁨으로 산다 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통할 수 있는 그 주체, 그 사랑의 주체는 누구냐?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내가 알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돼요. 알겠어요?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의 상대적 기준에서 내가 알아 가지고, 상대적 가치의 기준에서 판단해 가지고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절대적인 주체 앞에 상대권 판단기 준을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확보된 것에만 정지되어야 할 것이냐?확보했으면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 세계의 방향을 따라서, 의적(意的)인 방향을 따라서 전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전진함에 따라 거기에 접근하면 할수록, 거리가 단축되면 단축될수록 거기에 비례되는 수고와 수난의 길이 가중되지만 거기에 비례하여 기쁨도 결국 가중되기 마련입니다. 어떤 것이 강하냐?기쁨이 강하면 강했지 수고가 강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길은 승리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결정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 같은 양반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환난과 인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36)"라고 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랑을 느끼는 데에 있어서 모든 만유의 유아독존의 권위의 자리에 설 수 있는 특권적인 자리를 바라봤기 때문에, 거기에서 찾아지는 기쁨이라는 것은 죽어가면서도 주님을 위로할 수 있는 기쁨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길도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애의 귀결점도 그 기준을 중심삼고 간 것이 아니냐?성인이라는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다 그런 류(類)의 사람이 아니더냐?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그러면 개인이 설 수 있는 자리,가정이 설 수 있는 자리,종족이 설 수 있는 자리, 민족이 설 수 있는 자리,국가가 설 수 있는 자리, 세계가 설 수 있는 자리, 천주가 설 수 있는 자리, 하나님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개인과 가정은 이렇게 돼 있고, 종족은 이렇게 돼 있고, 민족은 이렇게 돼 있고, 국가는 이렇게 돼 있고, 세계는 이렇게 …. (판서한것 가리키시며) 이것은 상대적 방향입니다. 이것은 혼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의 방향이 일관된 하나의 역사성을 지닐 수 있는 그런 사상 체제를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는 거라구요.

인류는 어떻게 교육을 해야 되고, 어떤 가정을 추구하고 어떠한 씨족을 형성하고 어떤 민족, 어떤 국가를 형성하여 세계를 거쳐 하늘땅을 통합시킬 수 있느냐?그래 가지고 영원한 절대 주체, 주체와 나와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은 상대의 결합점을 이룰 수 있느냐?그걸 이룰 때에서야 비로소 상대세계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잘 갔더라도 가정이 잘못 가게 된다면 돌아가서 또다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관을 통할 수 있는 세계관을 바라보고, 세계관을 통할 수 있는 국가관, 국가관을 통할 수 있는 가정관, 가정관을 통할 수 있는 인생관을 바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것은 직선상에 있습니다. 시종일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게 아니라구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시종일관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은 이렇게 가야 하고, 가정은 이렇게 가야 하고, 종족은 저렇게, 민족은 그렇게, 국가는 어떻게, 세계는 이렇게 가야 한다는, 그것이 직선상에 모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한 자리에 선 새 우주관을 바라보면서 그 인격 가치를 자기가 추구하면서 개인적 인격을 중심삼고 고무줄을 이어서 사격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장에 서는 거예요. 거리는 멀더라도 쏘면 딱 맞는 거예요. 1킬로미터면 1킬로미터 앞에 표적이 있다 하더라도 쏘게 되면 딱 들어가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것을 맞출 수 있는 자리에 섰으면, 기분이 나쁘겠어요. 좋겠어요?거리가 멀면 멀수록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기쁠 수 없다 이거예요. 나 혼자 기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체가 기쁘려니 '나를 따라와라'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남편의 충성은 아내의 충성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요?여자가 땀을 흘려요. 피를 흘려요. 고생을 해요?한번도 안 나가지만, 그의 여편네라면 싸움은 하지 않았더라도, 백승장군은 안 됐더라도 그 나라의 군왕이 추대 하는 영광의 자리에 나갈 수 있어요. 없어요?있습니다. 왜?총부리를 한번 잡아 보기를 했어요. 적진에 나가 원수를 한 사람 보기를 했어요?보지도 않고 생각도 안 했더라도 상대자는 동참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다고 그 나라의 그 누구도 참소 못 하는 것입니다. 왜?왜?왜?사랑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그분만이 간섭할 수 있어요. 나라도 간섭 못 해요. 그것은 누구든지 다 바랄 수 있는 소망의 출발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일시에 특권적인 권한을 상속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