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과연 미래의 하나님의 뜻의 세계를 위해 살아왔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4권 PDF전문보기

우리 선조들은 과연 미래의 하나님의 뜻의 세계를 위해 살아왔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오랜 복귀섭리 역사시대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었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서 과연 그러한 사상을 갖고 죽어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이것이 문제라구요. 우리 선조들 가운데서, 아담 해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벨을 두고 볼 때, 아벨이 가인한테 맞아 죽으면서 과연 아벨이 역사적인 본연의 소망을 중심삼고 맞아 죽었느냐? 맞아 죽으면서 '아버지여, 내가 죽는 것은 당신의 미래의 뜻을 위하여, 당신이 원하는 소망의 뜻을 개척하기 위하여, 씨를 뿌리기 위하여 죽어 가나이다' 하고 죽었느냐? '내가 죽더라도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죽은 것은 가치 있는 죽음이다' 하고 생각하고 죽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120년 동안 수고한 노아 할아버지를 두고 보더라도 '내가 수고하는 것은 전부 다 뜻을 위하고 미래에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남기기 위해서 수고한다' 하는 입장에서 120년을 지냈다면 그 생애야말로 역사에 남아질 생애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120년 동안 수고해서 방주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만이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미래의 뜻은 생각지 않고 자기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그는 하나님이 택해 세운 본의에 합당한 인물이 못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노아 자신이 방주에서 내려오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내가 이런 생활을 했으며, 또 방주에서 내려와 가지고도 사는 일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미래의 뜻을 빛내기 위해서 산다' 하는 입장에서 지냈다면 한의 역사가 없었을 것이 아니냐? 이것이 문제된다는 거예요. 과연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수고한 모든 것이 미래의 하나님의 뜻의 세계를 위해서였느냐, 하나님이 바라는 소원과 일치될 수 있는, 하나님이 매일같이 찾아가고 싶고 매일같이 바라고 있는 미래의 세계를 노아도 같은 자리에서 바라면서 그런 일을 해 나갔느냐 할 때 전부 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했느냐? 아브라함도 그러했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그런 인간들을 대해 가지고 축복하게 될 때, '너는 미래 세계의 초인류적인 믿음의 조상이 된다. 너희 후손들은 미래에 있어서 초민족적이요 초국가적인 조상이 된다' 이렇게 가르쳐 주어야 할 텐데 불구하고 번번이 우리 선조들한테 가르쳐 준 것을 보면 '네 후손이…' 늘'너'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느냐.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 위의 모래와 같이 번창한다' 결국 너라는 것을 강조한 그것이 본래의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면 세계를 강조해야 할 것이, 세계 인류 전체를 대표한 자리에서 세계를 위한 네가 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조해야 할 것이 본래의 뜻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너'라는 자리를 강조하는 것보다도 '세계를 대표한 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번번이 '네 후손'이라든가 '너'라든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두고 볼 때, 이렇게 한 것은 우리 인간은 자기를 벗어 날 수 없는 약점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두고 봐도, 제물을 드린다든가 어떤 때든가 중요한 때마다 번번이 우리 조상들이 실수한 것은 왜 그랬느냐? 그것은 언제나 자기라는 관념을 중심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 그 버릇으로 말미암아, 그 전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수시키지 못한 결과가 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 가지고 나서서 언제든지 외로우나 어려우나 고독하고 슬픈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자기를 위한 슬픔이 아니요, 민족의 슬픔도 세계를 위한 슬픔이라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슬픔과 비참함을 대신해서 자기는 으레히 슬픈 길을 가야 되는 것이요. '자기가 이 슬픈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그의 슬픔을 제거시킬 수 있고 슬픈 길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나님편에 선 모세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번번이 외로우면 외롭다고 하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하고,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럽다고 하는, 자기를 중심삼고 주장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역사인 것을 우리는 여실히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례 요한 같은 양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을 미래의 하나님의 섭리 전체의 결실을 이루어 바칠 수 있는 대표자로 세웠습니다. 그가 사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래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것은 미래의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고 그것을 이루어 놓기 위해서 산다'고 하는 사상에 일관되고, 그런 관념에 사로잡혀서 산 세례 요한이 됐느냐? 아니라는 거예요. 언제나 자기의 전통과 습관과 구약 성경을 중심삼은 유대교의 풍습에 젖은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 가지고 자기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 가치를 발견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전통이라든가 습관적인 생활환경에 고착되어 고질된 입장에 서 가지고 예수를 대했기 때문에 미래의 뜻을 망각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미래를 대신하여 온 인격자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늘 앞에 반역의 길을 남기고 간 것이 아니냐.

이렇게 쭉 역사를 훑어보게 될 때, 우리 선조들이 그 시대의 사명자로서 세움을 받았지만 남아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미래에 사명을 이어 남겨 주어야 할 책임자들인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런 사명을 한 선조들이 누구냐 할 때, 꼬집어 가지고 누구누구다 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