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를 죽음의 자리로 내모는 하나님의 섭리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52권 PDF전문보기

사랑하는 자녀를 죽음의 자리로 내모는 하나님의 섭리

나는 여러분 앞에서 지금까지 시련도상에서 개척의 길을 걸어왔으나, 이제는 개척해 놓은 이 길을 여러분이 가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는 여러분을 모진 길로 몰아넣는 명령을 하든가 책임을 져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둬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더우기나 축복받은 패들은 축복이 얼마나 귀하며, 축복의 가치가 얼마나 크다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을 떠나서, 혹은 좋을 수 있는 인연을 떠나서 그 반대의 도상에서 축복의 가치를 하늘이 요구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렇기 때문에 축복받은 패들은 제일 일선에 서야 해요. 선생님이 지금까지 사정을 봐줬으나 앞으로는 그래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세계를 한 고비 넘겨 놓기 위해서는 넘어가야 하는 책임을 짊어겼다는 사람들이 단호한 결의 밑에서 스스로 하늘땅 앞에 결정지어 놓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이런 책임이 있는 연고로, 이 결정이라는 것은 외적인 결정만이 아니예요. 내적인 결정까지 해야 될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 앞에 하지 못할 일을 명령할 지도 몰라요. 사리에 당치 않는, 어느 누가 생각할 때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환경에다 몰아넣을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은 뜻을 따라 나오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알기를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책임을 짊어진 자리에 있어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예요. 책임을 완성할 때까지는 사랑의 하나님이 못 된다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책임을 완성해 놓고 만민 앞에 가치를 돌려줄 때에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날 수 있지, 책임을 완수해 나가는 도상에 있어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가지고는 뜻의 성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정하고 무정하신 하나님으로서 역사해 나왔던 것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구요.

맨 처음에는 평탄하게 닦아 준 그 길을 간다고 했지만, 최후의 고비에 가 가지고는 하나님이 수고한 가치를 자기 개체의 일신 앞에 전부 다 걸어 놓고 사탄과 하나님의 수고의 탕감까지 겸하여 가지고 부딪치게 됩니다. 이때에 그 환경에서 위치를 양보하게 되면 거기서 그 사람은 거꾸러지는 거예요. 이것이 하늘 섭리의 기반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앞으로 축복받은 가정들은, 뜻을 대신해 맹세했고 오늘 실적을 남긴 사람들은 이제 외적인 핍박보다도 하늘이 지도하는 책임자로부터 자기들이 상상치 않았던 명령이 내려지게 될 때, 엄숙히 그 일로를 향하여 전심전력으로 자기 일신의 외적인 환경을 정리하고 자기의 모든 체면과 위신을 잃어버리더라도 그 길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이 하늘 앞에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야만 여러분을 지도하는 스승이 아버지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고, 축복의 혜택을 이들로 말미암아 만민 앞에 나누어 달라고 할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나은 게 뭐예요?

예수님은 지금까지 애절한 십자가의 도상에서 승리의 한날을 세워 놓고는 영계에 가서 뭘하시느냐? 내적인 투쟁의 지도자가 되어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들을 죽음의 자리로 나가게 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늘이 섭리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죽음의 고개를 향해 나가라. 주저하지 말고 가라'고 하는 그 명령을 받고, 즉 외적인 핍박에서 승리한 신자들이 내적으로 명령하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투쟁의 길, 생사의 길을 가야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한 승리의 기반이 벌어져야만 그 기반 위에 내적인 주인 예수, 내적인 주인 성신이 임재할 수 있는 거예요. 성신과 예수가 임재한 그 기반 위에 실체를 이룬 외적인 자리를 세워야만이 비로소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는 거예요.

어느 기간만 지난 후에는 여러분과 사정을 통하던 선생님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때가 온다는 거예요. 때를 맞기 위해서는 굶주리는 입장에 있더라도 더 굶주리는 자리에 내몰아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라구요. 그래서 통일교회의 길은 가기 힘들다는 거예요. 그런 기간이 길는지 짧을는지 단언해서 말할 수 없어요. 단언해서 말할 수 없어요. 왜 그래야 되느냐? 지금까지 복귀노상에서 섭리의 뜻을 대신하여 나왔던 우리의 선지선열들이 하나님이 가라고 한 명령의 길을 얼마나 배반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명령하면 또 배반하였고, 가기로 맹세했다가 거꾸러지는 사실이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