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누구와 더불어 사는가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201권 PDF전문보기

우리는 지금 누구와 더불어 사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라구요. 기독교가 2천 년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인류 조상이 타락했다 하면 타락한 부모는 거짓 부모, 나쁜 부모고 타락하지 않은 부모는 선한 부모요, 참부모다 하는 것을 대번에 알 것인데 그것을 지금까지 발표 못 한 것은 발표할 수 있는 이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과거 역사시대에 참부모라는 것을 생각한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배후가 어떻다는 것을 풀 도리가 없었다구요. 통일교회의 방대한 원리의 전체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그것을 확실하게 풀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간단히 참부모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원리 말씀 혹은 통일교회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역사관, 또 인류의 본연적인 근원에 대한 사실을 밝혔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참부모라는 말을 확실히 앎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우리 인류 시조의 타락이 불륜한 관계로 말미암아 되어졌고, 하나님과 관계 없고 창조이상으로 세우려는 참된 부모와 관계 없는 혈통적 인연을 남겼다, 그릇된 핏줄을 이어받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참부모란 말은 인류 시조로부터 역사적 모든 인간들이 그릇된 혈통 가운데 사는 것을 청산해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로운 본연적인 뿌리를 중심삼은 사랑과 생명과 혈통이 이어진다는 뜻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이건 참 놀라운 말이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갖고 있고 생명을 갖고 있고 피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직결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핏줄이 연결된 그 자체가 오늘날 여러분 자신,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입니다. 이것은 몇억만 년 가더라도 그 자체가 부정당할 수 없는 절대적 자리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사는 데는 누구와 더불어 사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핏줄에 연결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달고 다니며 사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러한 인식, 그러한 개념이 확정되어 있어야 된다 이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혈통권이란 것은 하나님과 직결 되어져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핏줄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위하는 데에 중심을 둔 것입니다.

자, 그거 실감이 안 날 것입니다. 여러분들 말이예요, 여러분들 남자나 여자나 사랑의 상대를 구할 때에 자기보다도 못난 사람을 구하고, 또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사람 있어요? 「없습니다」 자기보다 더 높고 더 유명해지고 모든 면에서 더 훌륭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마음이 어디서 온 거예요? 우린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예요. 결과적 존재니 원인의 존재를 닮은 것입니다. 원인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 난 내 자신도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 자신도 그런 자리에 있다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들딸로 지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보다 못하기를 바라겠느냐? 하나님도 마찬가지라구요. 하나님보다도 더 낫기를 바라요. 또,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못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이거예요. 더 훌륭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참사랑을 중심삼고. 그러면 참사랑이 뭐냐? 참사랑을 중심삼고 그러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아담 해와를 지을 때에 자기의 모든 것, 사랑과 생명과 모든 것을 투입하고 더 투입하고 싶은 마음이 영속적인 그런 자리에서 우리를 만들었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는 여러분들도 목숨을 준다구요.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일이 벌어져요.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참된 사랑의 대상을 짓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는 고개를 넘어서까지도 투입하고 더 투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이거예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 자신도 참사랑의 대상을 짓는 데는 전체를 대상 때문에 살고 대상을 위하는 데서 전폭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지었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할 때, 하나님도 하나님 중심삼고 위하라는 것이 아니라 위하기 위한 자리에서 창조를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