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는 역사와 인류를 대표한 나로서 역사적 결실을 이루어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8권 PDF전문보기

오늘의 나는 역사와 인류를 대표한 나로서 역사적 결실을 이루어야

내가 기쁘다고 허허허 웃는다고 해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행복하다고 해도, 그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느냐? 그 행복이 미래와 관계를 지을 수 있느냐? 내일과 관계성을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을 모르겠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라구요. 더 큰 화통이 벌어진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혼자 같으면 단축이나 하지요. 만약, 혼자 망하게 되면 자기 혼자 망하겠다고 결심해서 혼자 망하면 되지만, 가정이 망하게 되면 얼마나 비참할 거예요? 자식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고, 아내, 혹은 남편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니, 그게 얼마나 비참하겠느냐?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 여러분들이 마음을 맞추어야 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통일교회의 탕감복귀라는 말이 참 고마운 말이라구요. 탕감복귀하려면, 과거에 실패했던 것을 그대로 현재에 전개해 놓고 그보다 나아야 합니다. 낫지 않으면 방향이 설정 안 됩니다. 그보다 못하면 안 된다구요. 조금 나으면 조금 나은 것만큼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인 위인들의 업적을 현재의 우리는 이어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4대 성인이 남긴 공적이 뭐냐?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구요. 그들은 인생이 갈 수 있는 대표적인 길을 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준이 멀었다 이겁니다. 개인으로서 가고 종족으로서 가고 국가가 가고 세계가 가야 된다는 그 표준이 막연하지만 동쪽 방향이다, 이렇게 돼 있다구요. 동쪽 방향으로 영점조정은 안 됐지만, 조금 기울어지든가, 조금 오른쪽으로 가든가 해서 치우치긴 치우쳤지만, 동쪽으로 가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겁니다. 이렇게 돼 있다구요. 그런데 그 성인들은 다 종교 지도자들이더라 이겁니다. 이거 이상하지요? 자기 혼자만으로 간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관과 일치될 수 있는 목적을 그려 갔기 때문에, 거기에 역사적인 인류가 동원되었다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구요.

현실에 기독교면 기독교의 나날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의 나날, 혹은 1973년이면 1973년 지금 기독교로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왼쪽으로 치우쳤느냐 하는 걸 생각지도 않는다구요. 그저 그냥 가면 된다는 거라구요. '기독교의 전통을 그저 그냥 따라가면 돼' 하는데 그건 좋다는 거예요. 역사를 맞추려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예수가 바라던 소원 기준과 일치되느냐? 안 됐거든 이 기독교는 몰락해 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터전을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방향이 틀리면 할수없다구요. 몰락해야지.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일치점을 확정지을 수 있는 현실에서, 미래의 일치점이 출발할 수 있는 오늘의 현실적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동강나 가지고 내 맘과 몸뚱이가 엇갈린 것과 같이 되면 안 된다구요. 어떻게 직선을 긋느냐 하는 운명권내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현실이 이러한 점에 놓여져 있는데 '나'라는 현실적 중심존재를 들고 나서 가지고, 한 시대 요때만 보고 사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사방으로 가더라도 깨져 나간다 이거예요. 요걸 표준으로 할 수는 없다 이겁니다.

오늘 '나'라는 것을 들고 나오려면, 역사를 대표한 내가 돼야 됩니다. 그렇지요? 그래야 되는 거라구. '나'라는 현실의 기반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표준점이 돼 있기 때문에, 역사의 초점을 대표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대표의 결실입니다. 따라서 내 개인을 중심삼고도 그러하지만,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은 물론이요, 인류를 대표한 자리에서 내가 역사적 결실의 자리에 섰다고 할 수 있는 확신이 서야 됩니다. 이런 자리면 이런 자리에서 대표의 자리에 섰다 할 수 있다면, 그는 역사적 첨단에 서 있다는 거라구요.

여기에서 세계사적인 첨단에 선 대표적인 '나'다 하는 자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가치 설정의 한 기점이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구요. 그것이 함부로 되어 가지고는 가치적인 것일 수가 없다구요. 역사시대를 대표한 '나'라 할 때, 과거의 역사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빛나는 가치를 플러스시킬 수 있는 '나'일 때에는, 나를 통해서 발전적인 미래가 계승될는지 모르지만, 역사시대보다 못한 '나' 일 때는 그렇게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가 그리던 이상을 현실적인 이상관으로 가져라!' 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갖고 있는 관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책임질 수 있는 관을 가져라. 그래야 선생님이 죽더라도 통일교회는 발전할 것이다. 안 그래요?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끊어지는 거라구요.

그런 입장을 조정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푸줏간을 가면 평저울로 재지요? 그 평저울을 보면 가운데 왔다갔다하는 것이 있지요? 그게 물건을 놓으면 무게에 따라 움직인다구요. 거기에 평점이, 조정점이 있다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은 조정점이라구요. 그런데 딴 데서 맞추면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그와 같이 돼 있는 것이 오늘 인생살이의 노정을 걸어가는 현재의 입장이요, 현실의 입장이요, 순간의 입장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다구요. 이 순간에 잘못하게 되면 사탄편이 될 수 있고, 잘하게 되면 하늘편이 될 수 있다구요. 자, 이것을 생각할 때, 복귀섭리가 얼마나 힘들겠느냐?

하나님이라도 할수없이 이런 역사시대를 거쳐 나오면서도 완성의 한때를 맞지 못한 것은 현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모든 조상들이 실패한 것은 그 어떤 현실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에 잘못을 했기 때문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