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상대에게서부터 오는 것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19권 PDF전문보기

사랑은 상대에게서부터 오는 것

(와이셔츠를 어머님이 넣어 주려 하심) 와이셔츠야? 고맙긴 고맙구만, 와이셔츠 넣기가 싫었는데. 자, 좀 넣어 줘. 뭐 그럴 거 있나? 못할 게 뭐 있어? (웃음.박수) 이게 우리 통일교회식 아니오? 이렇게 얘기할 때는 와이셔츠가 나왔는지 뭐 딴 것이 나왔는지 모르지 뭐. 그렇게 열심히 하면 좋은 거요. 그렇지요?「-예」 흉보는 녀석들이 정신이 좀 돌았는가 보지요. 그건 호외꾼이예요, 호외꾼.

자, 사랑은 어디서 온다구요? 사랑은 내게서 찾아지는 것, 내게서 뛰쳐 나오는 것?「아닙니다」 어디서 오는 거예요?「상대에서」 상대에서 오는 거예요. 그래, 사랑을 중심삼고는 밉고 고운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일단 부부가 이루어지면 골라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모양이 아무리 한국 기왓골에 열린 호박통처럼 생겼어도, 울통불통하게 생겨났 어도, 호박통처럼 생겼든 어떻게 생겼든 일단은 사랑으로…. 진짜 위하는 사랑이 있으면 말이예요…. 호박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뭔가? 수박이겠나, 수박? (웃음) 둥근 수박보다도 더 멋지다는 거예요. 그러니 다 살게 마련이예요. 진정히 보게 된다면 다 살게 마련이라구요. 그저 잘난 남자하고 형편 없는 여자하고 둘이 붙들고 사랑하는 걸 보게 된다면 말이예요. 그거 다 메우고도 남게 돼 있습니다. 진짜 사랑은 메우고도 남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생겼어도 말이예요,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지만 가만 뜯어보면, 눈을 뜯어보면 눈이 잘 못생겼고 말이예요, 코를 뜯어보면 코가 잘 못생겼고 그래요. 하나 하나 뜯어보면, 얼핏 보기에는 잘생겼는데 뜯어보면 못생겼다는 거예요. '입이 저 모양이 돼서 과부 될 입이고 말이예요, 홀아비 될 입이로구만'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구요. 내가 보기는 그렇다구요. 귓통을 보나 목덜미를 보나 가슴을 보나 궁둥 이를 보나 사지백체를 보나 잘생겼다고 자기는 자랑하고 있지만 푸-.

그래 사랑은 어디서부터 온다구요?「상대」 상대서부터 오는 거예요. 그래서 환경창조는 반드시 상대이상을 중심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상대이상의 중심이 뭐냐? 사랑이예요. 그 사랑의 본질적인 행로는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을 위해 찾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높여야 된다 이거예요, 하나님 대신. 하나님 대신 그저 높이고 위하다 보면 하나님의 아내의 자리에 올라간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내를 붙들고 따라갈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간다는 거예요. 반대의 말도 마찬가지다 이거예요. 남편을 하나님같이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 자리까지 올라간다 이거예요, 하나님 아들의 자리까지 올라간다는 거예요. 그럴 수 있는 길, 이것은 간단한 거라구요. 지극히 간단한 것인데 몰랐다 이거예요.

부모의 사랑이 좋지만, 부모의 사랑이 부모를 위하라는 사랑이라면 자식이 그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식의 사랑이 좋지만, 자식이 자기를 위하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부모도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나도 너를 위하고 너도 나를 위하는 그 사랑에…. 자기가 열을 주었으면, 위하는 사랑은 반드시 열 하나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위하는 사랑은 그래요.

상대가 조그만 것으로 나를 사랑하고 위해 주었으면, 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꾸 확대해 들어가는 거예요. 확대 확대하면서 시일이 가면, 일생 동안 그러다 보면 이것이 나라를 넘고 세계를 넘고 영원한 세계, 천국을 넘고 천상세계를 넘어간 다는 거예요.

자기를 위하라는 데는 전부 다 삭감이예요, 삭감. 마이너스예요. 한번 하고 난 다음에 두 번 할 때는 열이었던 그 사랑이 삭감돼 가지고 여덟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밤낮 자기만을 위하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거꾸로 말려 들어간다는 거예요. 사랑은 어디서 오느냐? 상대에서 오는데 위하고자 하는 그 길을 따라서만이 순수한 이상적 사랑이 왕래하느니라. 아멘 ! 한번 해봐요. 「아멘 !」

오늘 여기서 싸움을 한다는 사람, 옛날에 싸움한 그런 내용이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구요.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옛날 싸움한 그와 같은 자리에 딱 부딪치게 될 때 누가 승리하는 사람이냐, 누가 아벨이냐 이거예요.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은 뭐냐? 희생하는 사람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종교는 희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을 찾기 위한 길을 역사를 두고 가기 때문에, 종교의 세계는 희생을 모토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만약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때에 사랑을 받겠다고 했으면 '야, 이놈의 로마 병정들아! 이놈의 자식들아! 너희가 나를 죽여, 이 자식들아!' 하면서 저주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세계를 위하는 사랑, 국가를 위하는 사랑은 어디서 찾을 것이냐? 그것은 저 국가의 주권자요, 로마의 병정들에게서 찾아야 했기 때문에 국가적, 세계적 사랑을 찾아가야 할 예수는 그 원수들을 위해 죽는다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거 놀라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