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에게나 꿈이 있어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59권 PDF전문보기

사람은 누구에게나 꿈이 있어

하나님이 만물을 지을 때 얼마나 사랑했겠어요? 사랑했겠지요? 길가에 씀바귀 한 포기를 보더라도 우리는 무심코 지나가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정열이 깃들어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상의 일면이 깃들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소망의 면면이 그 만물한테서 풍기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어 놓고 기뻐하지 않은 물건이 없는 한, 그 물건이 기쁨의 상징으로 되어 있거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고 하나님의 정성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바라볼 때, 그런 심정적인 인연으로 취급해 주는 사람과 그 반대되는 반역적인 심정을 갖고 취급하는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이 이 두 종류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원할 것이냐?

자연환경에 박자를 맞춰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그것을, 그들의 소원과 그들의 사정과 그들의 가치를 알아 쓰다듬으면서 `너를 희생시킨 것은 더 큰 가치를 위하기 때문이라'는 원칙을 발견하면서 그를 대하고 그를 희생시키고 그를 밀어낸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하늘이 벌을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선이 가는 길은, 작은 선은 큰 선에 흡수되는 것이 천지법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계를 위해 국가는 이용당해야 되고 국가 앞에 민족은 이용당해야 되고 민족 앞에 종족은 이용당해야 돼요. 흡수돼야 된다 이거예요. 종족 앞에 가정이, 가정 앞에 개인이, 개인을 중심삼고는 마음 앞에 몸이 이용당하는 것이 천지법도가 돼 있기 때문에 더 큰 것 앞에, 더 큰 가치 앞에 흡수돼야 됩니다.

이것은 배척할래야 배척할 수 없어요. 배척하지 않는 한 그는 영존할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 천리법도 앞에 하나님의 심정을 따라 지은 만물이 그런 입장에서 존재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심정을 가져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생활하면서 일생을 걸어간다 하면 그 사람은 절대 안 망한다 이거예요. 이런 것을 주욱― 생각해 봤다구요.

이 말을 왜 하느냐? 국가간의 차이가 있고, 교단과 교단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신랑 각시다 이거예요.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에는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여자 대하는 기분과 남자 대하는 기분이 달라요. 같지 않다는 거예요. 여자는 방년 16세가 될 때 봄절기 기분이 나고, 남자의 꿋꿋한 모습을 바라볼 때 가을절기 기분이 난다 이거예요. 그런 거예요.

또 여자를 보게 되면 말이지요. 웃든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든가 할 때는 그 풍부한 모습이 깃들어 있는 거예요. 여름 같은 기분이 난다는 거예요. 또 남자의 꿋꿋한 모습을 보게 될 때는 냉랭한 겨울 같은 기분이 깃들어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남자와 여자가 대하는 환경과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본래 지니고 있는 가치, 새로운 천지의 꿈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던 꿈이 있던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닮은 인간 역시 꿈이 있을 것입니다. 꿈이 있겠지요? 여러분에게 꿈이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꿈이 있음과 동시에 정서가 있을 것입니다. 정서가 있음과 동시에 거기에는 시적 경지가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꿈을 지녀야 된다는 거예요. 시적 감정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그다음에 문학적인 생활, 문학적인 일면이 거기에는 반드시 내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보통 처녀들이 사춘기에 들어가면 말이지요, 소설 읽기에 재미나서 아주 꿀단진지 무슨 단진지는 모르지만 밤이 가는 줄 모르고 그저…. 닭이 울더라도 깊은 신비경에 들어가 가지고, 최고 경지에 들어갈 때 밤을 새워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 그걸 탐독하려는 것을 여자들은 체험했을 거예요. 이런 걸 볼 때 여성에게 있어서도 그런 문학의 세계가 있는 거예요.

문학의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 동기도 있어요. 문학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얘기요 생활의 일면의 정서적인 표현이지만, 시적 동기가 되는 정서적인 면은 입체성을 표현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면, 사랑의 표시도 마음대로 다른 입체성으로 표시할 수 있는 거예요. 싫은 말 같지만 그 말이 사랑으로 표시될 수 있는 거예요. 입체적인 정서까지 지닐 수 있는 경지가 시적 경지라는 거예요. 이런 꿈이 있어야 된다구요.

우리 인간이 그렇다는 것은 곧 하나님도 그렇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을 두고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은 같을 수가 없어요. 정서적인 면에서나 환경적인 면에서 달라요. 그렇지만 하나님이라고 해서 본성을 지닌 인간을 무시하고 대하는 주체 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 없어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주체적인 본래의 성품에 부합된 그런 감정이 발발할 수 있는 동기로부터 이것이 뻗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의 모든 것을 품고, 입체적으로 내 동지면 동지가 될 수 있고 내 주인이면 주인이 될 수 있고 내가 의지하게 되면 의지할 수 있고, 자기를 백 퍼센트 알아줄 수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이 인간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런 세상을 가졌을 때, 그런 자리에서 사람을 중심삼은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꿈이 두 자체로 벌어질 수 있는 상대적 꿈이 아니라 이 꿈 자체가 만나는 그 자리에서는 온 우주가 거기에 박자를 맞춰 줄 수 있고 천지가 이를 증거할 수 있는 입체적인 그런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이걸 볼 때 하나님도 역시 꿈이 있다구요. 하나님도 역시 정성을 들인 시적 경지와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의 문학적인 감정이 거기에 개재돼 있다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도 그렇다는 거예요.

창조주와 피조물에 있어서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이 상관해 가지고 이해하고 서로 화동하고 서로서로 화합하고 서로서로 교차될 수 있으면서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경지를 찾아나가는 데에서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공통적인 목적이 성취된다는 것을 우리가 원리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남자는 여자를 대할 때, `여자에게 무슨 꿈이 있나? 남자를 위하면 되지. 여자는 남자의 꿈을 따라가야 돼' 이러면 되겠어요? `이놈의 고기 새끼야, 너는 나 때문에 태어났지, 네 마음대로 할 게 뭐야? 이놈의 풀 같은 건 뭐야?' 이러면 안 된다 이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