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충효의 도리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참효의 생활

제 3 장 충효의 도리

1)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진정한 충효

신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면 열녀라 합니다. 효자는 부모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하고, 충신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준은 영원한 생명을 걸어 놓고 충성하고 효도하는 것입니다. 이 고깃덩어리는 죽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걸어놓고, 그것을 몽땅 아버지 것으로, 신랑 것으로, 부모 것으로 드릴 수 있는 자리에서만 천적인 열녀의 기준이 성립됩니다. 내 생명이 움직이고 느끼는 전체를 다 기울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다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세계의 어떤 충신보다도, 어떤 효자 효녀보다도, 어떤 열녀보다도 더 나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탄세계에도 충신·열녀가 그렇게 많았는데, 그 사탄세계의 충신·열녀의 기준과 같은 기준을 세운 사람을 하늘이 충신·열녀로 세우면 하나님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9-109, 1960.4.24)

효자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시대시대마다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일등 효자를 뽑는다면 어떤 사람을 일등 효자, 효자의 표본으로 뽑을 것이냐? 늙어서 효자 노릇을 하다 죽는 것보다도 젊어서 늙은 사람 이상의 효자 노릇을 했다면 그 사람이 더 귀한 것입니다. 효자도 천태만상입니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막일하는 사람, 빌어먹는 사람, 별의별 계급이 있지만 효자는 다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참된 효자가 못 됩니다. 생명을 아직까지 남기고 있는 사람은 효자 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효도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죽지 않은 사람이 효자 표창을 받았다가는 효도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한테 참소받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 가운데에서도 효도하기 위해 길을 가다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병이 났기 때문에 약을 구하러 가다가 죽은 효자도 있을 것입니다.

약을 구하러 가는 데는 자기 돈을 가지고 구하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빚을 얻어가지고 구하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가치가 커지는 것입니다. 충신도 죽기 전에는 충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49-280, 1971.10.17)

효자가 되려면 어떤 자리에 서야 되느냐? 죽음길, 제일 수난길을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효자로서 갈 길은 무엇이냐? 형제를 나 사랑하는 이상 사랑하고, 네가 나를 위해서 있듯이 형제를 위해서 있어달라고 하는 것이 효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렇게 부모는 부모의 뜻을 얘기할 것입니다. (62-37, 1972.9.10)

효자 중의 진짜 효자는 어떤 사람이냐? 부모를 위해 일생 전부를 희생하고 7,80세 고령이 되도록 효성을 다한 사람과, 젊은 청춘으로서 부모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효자가 있다고 할 때, 누가 더 효자라고 할 수 있느냐?

아무리 7,80이 되도록 효자의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청춘 시대에 부모를 위해 생명을 바친 효자에게는 못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충신은 죽은 후에, 생명을 바친 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효자도 생명이 엇바뀌는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시대에서 많이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48-65, 1971.9.5)

충신의 이름을 갖고 나서는 사람도 하늘을 위해 살아야 충신이란 칭호를 하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효자의 길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먹는 것도 그것을 위해 먹고, 내가 보는 것도 그것을 위해 보고, 내가 말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말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도 그 목적을 위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슬픔과 눈물의 길일지라도 천상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가야 할 그 길을 대신 맡아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효자의 도리와 충신의 도리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눈물의 길을 가로막고서 나는 땅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다시 그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41-157, 1971.2.14)

효자나 충신은 죽을 때까지, 죽음과 같이하지 않고는 진짜 충신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충신은 죽기 전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고생을 했더라도 오늘 한마디 후회하는 말을 하게 되면 충신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아무리 충신이 됐더라도 이 시간에 불충하게 되면 역적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어갈 때까지 충효의 도리를 하고 가야만 충효를 다한 사람이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길에 있어서는 충과 효는 그 과정이 같은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을 애국자라고 하는 것이고, 부모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아들을 효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죽기 전까지 불효했지만 최후에 부모가 죽을 자리에 처했을 때, 지금까지 효도하던 자식은 불효하게 되고 불효한 자식이 돌아서게 되면, 효도하던 그 자리를 이어받아가지고 한 순간 효도함으로 말미암아 부모 앞에 효자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하루의 행동의 기준과 더불어 효자의 칭호를 갖고 등장하게 됩니다. 생명을 다할 때까지 그 목적을 향해서 가는 사람 앞에 영광의 상속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64-75, 1972.10.24)

오랫동안 고생하는 것보다는 진정으로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중대한 문제와 세계적인 문제에 몸을 던져서 `죽어 버리고 말자! 폭발해 버리고 말자!` 이러한 각오를 갖는 것이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멋진 것이라고 선생님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최후를 마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훌륭한 곳에 가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18-282, 1967.6.12)

부모는 효자·충신·성인·성자와 같은 전진적인 것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자기 아들에게 효자·충신·성인·성자의 도리를 다하고 그 후에 하나님까지 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볼 때 `야, 그 사람 부모 노릇 한다. 그 사람 선생 노릇 한다. 그 사람 주인 노릇 한다.`고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네가 부모의 자격이 있고, 선생의 자격이 있다.` 할 때는 주인의 자격이 있고, 더 나아가서 왕이 될 수 있는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 사람들에게는 효자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충신의 개념이 없습니다. 성인의 개념이 없습니다. 성자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인은 누가 원하느냐? 세계가 원하는 겁니다. 나라는 뭘 원하느냐 하면, 충신을 원합니다. 가정은 효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참된 진리의 길입니다. (285-218, 1997.5.19)

참된 부모가 있다면 `너는 효자가 됐으니 충신이 되지 말라. 충신의 길을 가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참된 부모는 그 효자에게 `너는 가정을 희생해가지고 충신의 길을 찾아 나라를 섬겨야 되고, 성인의 도리를 다해야 되고, 성인의 도리를 희생시켜가지고 하늘이 바라는 길을 가야 되고, 하늘땅을 희생시켜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된다.`고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가정을 위해서 희생해야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나라의 애국자가 되려면 그 가정 전체를 희생시켜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됩니다. 그래야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인이라는 것은 자기 나라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자는 세계를 희생시켜서라도 하늘나라와 땅, 지상천국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투입하고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나라는 영원히 안 나오는 것입니다. (285-219, 1997.5.19)

기독교인의 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 어디든지 가겠다고 결의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기다리라.`고 분부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몇억의 신자를 자랑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과연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너를 하늘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치고자 하니, 생명을 바칠 테냐?` 할 때 그 고비를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을 걸어 놓고 하나님을 위한 효성에 불타는 사람, 하늘을 걸고 뒤넘이칠 수 있는 그런 무리가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이런 무리가 끝날 하늘의 혁명군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 인류 앞에 그러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철두철미한 사상과 일치하는 개인·가정·민족·국가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그러한 개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한 개인은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효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땅의 모든 사정을 풀어 헤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시대 앞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자가 너로다. 너를 바라보니 내일을 소망할 수 있고, 너를 바라보니 오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겠구나.` 하실 수 있는 한 개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너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심정 중의 심정이로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역사상 선조가 많고 시대적으로 인류가 많다 할지라도 심정을 중심삼고 `너는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조상의 자리에 있다.` 할 수 있는 분이 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인류 조상의 타락으로 인한 슬픔의 역사는 청산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속에 태어난 우리들은 또다시 어떤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5-216, 1965.10.10)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남아져야 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남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더라도 그것들을 남겨 줘야 됩니다. 그것을 남기기 위해서 자기 생애를 희생하는 사람은 효자가 되는 것이요, 충신이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루 효자, 하루 충신은 필요없습니다. 하루 효자는 아무리 악한 강도라도 될 수 있는 것이요, 하루 충신 역시 누구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 회개하면 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태어날 때부터 효자, 충신으로 태어나서 효자와 충신으로 살다가 효자와 충신으로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선생님을 비교하게 되면 선생님이 여러분보다 하나님 앞에 더 효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이런 일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효자의 도리를 다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면 갈수록 부족함을 느낍니다. 효자의 도리, 충신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기에서 효자나 충신으로 끝입니다.

`내가 효자인데, 내가 충신인데 왜 몰라주느냐?`고 항거하는 사람은 그 고개에서 후퇴하는 사람입니다. 가면 갈수록 효의 도리가 남아 있고, 가면 갈수록 충의 도리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효를 다하는 것을 자기의 생활 철학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라야 하늘의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35-342, 1970.11.1)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행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배우자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그래도 좋고 안 그래도 좋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효자가 되고, 충신·열녀가 되는 겁니다. 효를 세울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충을 세울 수 있는 것은 그 나라가 완전히 편안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국태민안한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형편이 최후의 고비에 부딪쳐서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전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최후의 역경에 있어서, 자기의 생명을 걸고 있는 정성을 다하여 국운을 돌려 국난을 풀어 주는 책임과 내용을 세운 자라야만 그 나라의 충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충의 명사, 어려울 때 효의 명사, 어려울 때 열녀라는 명사가 역사노정에 기록되는 겁니다. (151-219, 1962.12.15)

여러분의 아내에게 눈이 가는 것보다도 남북으로 분단된 여러분의 나라를 생각해야 됩니다. 분단되어 있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생각해야 됩니다. 남북을 하나 만들고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로 분립된 이 세계를 하나 만들어야 됩니다. 그걸 하나로 만들고는 갈라진 영계와 지상을 하나로 만들어야 됩니다. 이걸 하나로 만들어가지고 하나님을 해방해야 할 것이 아들의 이름을 가진 효자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15-162, 1981.11.8)

그러므로 참된 효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역사 이래 아무리 핍박이 사무치고, 어려운 고비길이 많다 하더라도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여유만만한 사나이가 되어야 됩니다. 환난과 시련 가운데 시달려 후퇴의 여념을 가지고 슬픈 한의 길로 돌아설 것이 아니라, 억천만세의 고충과 수난길을 극복하고 또 극복하면서 결의하고 다짐하여, 내일의 희망에 벅찬 재출발의 길을 촉구해 나가면서 죽음길도 가려 갈 줄 아는 길을 남기고 가야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74-43, 1988.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