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양심의 길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6권 PDF전문보기

사랑과 양심의 길

사랑의 세계에서는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그 가치가 작아지는 거예요? 커지는 것입니다. 보통 힘의 작용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소모되는 세상에 있어서 사랑의 힘만이 플러스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희생 운동도 하는 것입니다.

희생을 했지만 사랑하고 난 후에는 희생한 이상의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고생할수록 사랑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구요. 투입했던 저항 요건이, 그 자체를 소모시키는 것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보통 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항이 있으면 그만큼 비례적인 마이너스를 가져오지만, 반대로 플러스를 가져오는 작용이 우주 가운데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의 작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소모시키고 투입하면 할수록 망하는 것이 아니라 투입하면 할수록 플러스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상세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상세계를 이루려면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데는 힘을 가해야 되는데 힘의 원칙을 보면 나오는 힘이 작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상세계는 절대 안 나와야 된다는 거라구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세계가 어떻게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느냐? 사랑의 힘은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다른 힘의 원칙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야, 네가 잘살기 위해서는 그 무엇을 중심삼고 어떻게 해라' 그렇게 가르치는 양심은 없습니다. '네가 희생해라. 여러 사람 앞에 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본이 되라'고 하지요? 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중앙에 딱 들어가 서야 됩니다. 전체의 본이 되려면 일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네가 중앙에 들어가 서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이 사람은 동쪽으로 누울 수도 없고 서쪽으로 누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딱 서 있어라! 딱 서 있는 데는 일년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영원히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중심이 되려면 그와 같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일시적으로 서 있다가 나가자빠지면 중심이 안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영원히 서있어야 되느냐? 영원과 통하지 않고는 중심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중심자리는 하나님이 서야 될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설 자리를 대신해서 서기 위해서는 영원을 표준하고 서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중심삼은 선의 길은 영원을 표준하고 설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서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사방의 표준을 갖추지 않고는 나오지 못합니다. 양심은 중심에서 기울어질 때에만 명령을 합니다. 똑바로 딱 서 있으면 양심은 어떻게 되느냐? 작용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좋다고 춤이라도 추었으면 좋겠는데 안 춥니다. 딱 기울어질 때만 나타납니다. 또 더 높아지려고 할 때에 양심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가만히 있을 때에는 양심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기울어지려고 할 때는 작용합니다. 또 높아지려고 할 때도 양심은 작용합니다.

그러면 기울어지려고 할 때는 어느 때냐? 악과 더불어 짝할 때에는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높아지려고 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자기 자체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자기 힘 가지고 안 됩니다. 새로운 주체를 바라볼 때에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의 작용을 최극단적인 한계선까지 자극시키는 주체적 표준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절대자이십니다. 영원한 존재이십니다.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인데 어떠한 하나님이냐? 나와 더불어 사랑의 관계를 중심삼고 맺어진 하나님입니다.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희생이 빛나는 것이요,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극복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생애를 투입해 가지고 무(無)의 입장에서 개척해 나가더라도 무의 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 같지만 실재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입장에 설 때에 반대로 무한한 사랑이 그의 배후에 접선되어 오기 때문에, 양심은 이것을 향하라고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보라구요.

높아질 수 있는 곳을 향하여 넘어가라 할 때 그냥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하고 넘어가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입장에서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야, 네가 그렇게 되어라' 할 때는 남의 것을 그냥 빼앗아 가지고 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이상의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이상 노력해서 그렇게 되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데도 그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되겠다는 것만을 생각한다는 거예요.

나쁜 곳이 있으면 양심은 '야! 거기는 가지 마라' 하고 가르쳐 줍니다. 가지 않기 위해서는 갈 수 있는 환경의 요건을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내용을 제시하면서 명령하는데, 이것을 인식치 않고 행하고 싶고 가고 싶어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정적인 요건을 극복하고 감수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극복하고 부정하는 데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때문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예요.

병신 자식이 한 번 마음쓰는 것이 잘난 자식이 열 번 마음쓰는 것보다도 더 가치적으로 보답되는 것이 아니냐? 가치적일 수 있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종교 가운데는 사랑을 빼놓은 종교가 없는 것입니다. 자비니 인(仁)이니 하는 것도 전부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사랑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