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중심삼은 기독교연합 운동과 한국에서의 복귀노정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65권 PDF전문보기

미국을 중심삼은 기독교연합 운동과 한국에서의 복귀노정

그런데 기성교회가 반대하고 나라가 반대하니까 자작, 내 자작으로서 기독교 대신 교회를 만들어서 이것을 평균 기준까지 올려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나 가정을 중심삼고나 그 평균 기준에 있어서는 아벨 입장인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앞서야 되고, 종족 기준에서도 앞서야 됩니다. 민족적 전체 기준에서 가정을 이끌고 나가는 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어떤 가정보다 앞서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1970년 3년노정에 430가정을 전부 동원한 거예요. 3년 동안 동원한 거라구요.

이건 뭐냐 하면 대한민국의 어떤 가정이든지 통일교회의 가정을 못 당한다는 겁니다. 가정으로서 아벨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가정적 아벨 기반을 닦아 가지고 그 기반 위에 민족적 기반을 세우고 그 민족적 기반 위에서 가정을 중심삼은 아벨권을 조성했기 때문에, 국가적 기반 위에서 세계무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1972년부터 세계로 출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1973년에 완전히 미국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국 기독교연합운동을 한 거예요. 기독교가 반대했으니까, 기독교가 자꾸 떨어져 내려가니까 그것을 스톱시켜야 했던 거라구요. 그래서 미국을 일주하면서 그 운동을 했는데 전기독교가 환영했습니다. 환영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환영한 기준을 중심삼고 197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내가 돌아온 거예요. 돌아와 가지고 그다음엔 이 한국과 대결전을 해야 되겠다고 해서….

그래서 정보부 차장, 이철희 장군을 데려다가 설득 훈련을 시킨 거예요. 이 사람이 실권자거든요. 그래서 내가 축복을 해주고 감투를 씌워 가지고 기성교회하고 싸워야 되 겠다고 설득했어요. 그때는 기성교회하고 정부하고 결속시키는 거예요. 내가 대신 싸움을 할 테니까 전부 다 통일교회를 싸움편으로 몰아넣고 기성교회와 정부를 밀어라 이랬어요. 이래 가지고 1975년 4월 1일에 기동대를 전부 다 오게 해 가지고 대회를 출발한 거예요.

부산에서부터 거꾸로 올라온 거예요. 그게 복귀라구요, 복귀! 부산으로부터 죽 올라와 가지고 대구로 해서 올라오는데 전부 차 버리려고 해요, 기성교회가 말이예요. 그리고 나라가 협조를 안 해요. 그러나 나라는 우리 편이 됐어요. 부산에서도 전부 다 그렇게 많은 수가 모일 줄 몰랐지요. 말하자면 국민이 전부 다 내 편으로 몰려온 거예요. 그런 운동이 벌어졌다구요.

그렇게 해서 부산에서 격전이 벌어졌어요. 그다음에 대구 가서 격돌하고, 그다음에는 대전을 중심삼고…. (웃으심) 갈 때는 대전이 3방어선이예요. 서울에 못 올라가게 하는 거예요. 그래도 서울까지 와 가지고 대판 싸움을 했어요. 이래 가지고 별의별 싸움을 다 했다구요. 장충동을 중심삼고 후원받고 있을 때 말이예요, 전부 돌을 던지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던 사실들이 훤하구만. 그런 싸움을 했지만 기성교회가 결국은 여의도 대회에서 완전히 손들었어요. 그 바람에 현정부도 무서워하고.

그다음에 그때 길전식이가 공화당의 사무총장이었거든요. 이게 이 세상을 들었다 놓으니까 그때 박정희 정권이 놀라 자빠진 겁니다. 그래 길전식이하고 그다음에 누군가? 두 사람을 보내 가지고 제발 만나자고 해서 통일교회의 움직이는 내적 활동이나 조직 등을 물어 봤다구요. 그래서 그때 내가 설득을 하던 생각이 난다구요. 그 길전식이가 이번에 마사회 회장이 돼 가지고 떡 나타났더라구요. (웃음) 그래서 그때 얘기를 하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서로 바라보며 얘기했다구요. 그때 자기들이 실권을 쥐어 가지고 통일교회를 없애려고 생각했었다구요. 그러나 없앨 그 무엇이 아무것도 없었지 요.

이래 가지고 대승리를 거두고 그다음에는 영적 세계 기독교, 미국의 승리권을 한국에 접붙여 놓은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한국이 세계로 나갈 길이 없다는 거예요. 한국의 기독교가 반대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을 부활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기독교가 환영한 그 터전을 여기 한국에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국가적 기준까지, 국민 기준까지 전부 다 탕감조건을 세워 놓은 거예요. 그 조건을 중심삼고 세계에 연결함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전략시대로 넘어간 거예요.

그다음에는 미국정부의 도전시대로 들어간 거예요. 이래 가지고 카터정부를 중심삼고 4년 동안 본격적으로 싸움을 했어요. 때려잡는 싸움을 한 거예요. 닉슨시대를 거쳐 카터정부, 그다음에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뭔가, 포드가 있잖아요? 포드는 닉슨의 후계자였고 말이예요. 닉슨시대에서부터 카터시대, 레이건시대에 들어왔어요.

레이건 대통령은 내가 협조를 안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수파가 거꾸로 꽂히고 자유세계 앞에 머리를 못 들게 된 것을 전부 다 내가 풍토를 바꿔 놓았습니다.

국회에서 청문회를 중심으로 박보희를 시켜 가지고 '싸워라, 이놈의 자식!' 이랬다구요. 그때 프레이저 이놈이 총수였다구요. 좌익 편의 총수였어요. 그런 총수의 대가리를 부순 거예요. 선거 때 참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다구요. 한 시 반에 선거에 승리했다고 축하파티를 했는데, 네 시반에 일어나 보니까 졌다 이거예요. (웃음) 그건 틀림없이 이긴다고 봤는데…. 그때까지 보고를 듣기로는 완전히 이겼거든요. 그러니까 이젠 틀림없이 이긴다고 생각했지만, 세 시간 동안에 완전히 녹아 난 거예요. 그래서 한4천 표에 가까운 표수로 진 거예요. 우리 때문에 진 거라구요. 이놈의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