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굴복을 바라 나오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뜻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2권 PDF전문보기

자연굴복을 바라 나오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뜻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일 때, 그것을 기뻐하신 하나님이라면 무력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승리를 자랑할 수 있는 길을 찾았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원치 않으셨던 하나님이 아니냐. 노아가 방주를 짓고 난 이후에 방주에서 내려와 가지고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함을 쳐 버리고 승리의 기반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 어디까지나 자연굴복을 바라 나오는 것이 섭리의 뜻이기 때문에 오래고 지루한 역사시대를 지금가지 참고 나오는 것이 아니더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노아도 그랬고,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 아니냐? 바로가 사라를 빼앗아다가 유린하려는 그러한 정경을 바라보셨던 하나님은 쳐 가지고 승리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감동시켜 가지고, 자의에 의해 가지고 하늘 앞에 굴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왔던 것이 아니냐.

야곱도 마찬가지 아니냐. 야곱은 21년 동안 자기의 장자 기업을 빼앗겠다고 원수시하고 생명을 노리고 있는 에서를 대해 가지고 자기가 축복 받은 모든 것, 당당한 자기 일신의 영광, 일신의 권위를 가지고 형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힘의 대결로써 해결하려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도리어 순응의 도리를 앞세워 가지고 옛날 형제의 인연의 심정을 유발시키는 데 노력했던 야곱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외지에서 성공하여 갖춘 그 모든 환경을 자랑하기 위해서보다도 어떻게 부모의 심정을 유발시키고 형제지정을 유발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노력하였던 야곱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돌아와 가지고 형을 대해 '우리 주인이요'라고, 우리 주인이라고까지 한 찬양의 명사를 보게 된다면, 과연 그는 누구보다도 형님을 높이기 위한 자리에 섰던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악했던 형님의 마음이, 강퍅했던 형님의 마음이 감동되어 녹아짐으로 말미암아, 형님 에서를 위하고 높여 주는 마음을 가지고서 굴복시킴으로 말미암아 천도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기막힌 주목의 시간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 40일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의 원성이 높아졌고 또한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내려와 혈기를 부려 가지고 하늘로부터 받아 쥔 반석을 깨 버렸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실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참고 극복해야 할 그 순간을 잘 넘었더라면 역사적인 원한의 구덩이를 파지 않았을 텐데, 책임자로서 혈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환경을 잘 넘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오점이 심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세례 요한을 두고 보면, 세례 요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했으면 증거한 대로 행해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말했으면 말한 대로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인간적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예수를 두고 보면 예수는 자기의 동생 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자란 과정을 다 알고 있는 세례 요한으로서는 도저히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만일에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세운 그 입장이라는 것은 내가 비판할 수 있는 입장보다도 더 엄숙하고 더 기막힌 입장이라는 것을, 그런 입장에서 내세웠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