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인간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37권 PDF전문보기

사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인간

그래서 '나'라는 개념은 이 우주의 사랑을 대표한 시작에서부터 저 끝까지 가는 중앙선 자리에 있으니 그 사랑을 대표한 선이 나라고 정할 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노(no)' 할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노'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디 가서 살고 싶어요? 할머니들, 혼자 사는 할머니들 있어요? 나이 많은 할머니들 혼자 살지요. 그 할머니한테 '어디 가고 싶어요?' 하면 '어디 가고 싶기는 어디 가고 싶어? 거 냄새나는 노인 영감 품에 가보고 싶지' 한다구요. 그 손자들은 '아이구, 할아버지 냄새 나는데 그 할아버지 옆에 또 가' 이럴 텐데 할머니들은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할머니 아니니까 모르겠구만, 할머니 되어 보라구. 틀림없이 그렇다고 나는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거 보기에는 싫을 것 같은 데 좋아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예요. 또 영감도 그래요, 영감도. 죽게 되면 말이예요 '영감님! 뭐 생각합니까?' 그러면 '생각하긴 무슨 생각 해, 마누라 생각하지' 그러는 거예요. 거 마누라 생각한다구요. 그 마누라를 볼 적에 본래 조그마한 마누라예요. 키를 봐도 조그마한 노인이고, 뭐 걷는 것 봐도 뭐 원숭이 사촌 같은 그런 할머니인데 뭐 '아이구, 저놈의 영감 미쳐서 그러지 뭐' 그게 아니라구요. 거기에서는 그 나름대로 자기가 갖는 사랑의 맛이 다르다는 거예요.

못생기면 못생긴 데서 사랑의 맛이 있다는 거예요. 미인에게는 매끈매끈한 사랑의 맛이 있다면, 매끈매끈 반대가 뭐예요? 못생겼지만 울퉁불퉁한 사랑의 맛도 있다는 거예요. 못생긴 사람의 사랑의 맛은 더 멋지다는 거예요.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는 거예요. (웃음) 아니예요? 그렇다는 거예요. 또 못생긴 사람이 사랑을 하면 못생겼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더라도 2배 더 사랑한다는 거예요. 마음 바탕부터 근사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을 가만 보면, 부처(夫妻)를 가만 보게 되면 말이예요, 참 이상하다구요. 저놈의 자식, 저 허우대를 보아 가지고는 미남 중의 미남으로 눈을 보나 코를 보나 생긴 것이 멀쩡하게 생겼는데, 아 여자를 보니까 거 재수덩이로 생겼어요, 재수덩이로. 그래도 붙들고 사는 거예요. 거 너 왜 붙들고 사느냐? 첫사랑의 맛을 못 잊어서. 첫사랑이라는 거예요, 첫사랑. 첫사랑의 맛이 최고의 맛이라는 거예요.

뭐 여기에서 오늘 이런 얘기 하는 것이 쌍소리라고…. 쌍소리가 아니예요. 거 문선생 뭐 사랑 얘기라고 내놓고 쌍소리 하더라 그래요. 그 저 쌍소리라고 해도 좋다는 거예요. 영원히 좋다는데 뭐, 하나님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면 천국 가고도 남았지 뭐. 알았어요? 「예」

나, 나, 나가 누구냐? 왜 태어났어요? 내가 왜 태어났어요? 왜 태어나긴 왜 태어나? 돈,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서 태어났지. 왜 태어나긴 왜 태어나? 대통령 해먹기 위해서…. 아이구, 말라 버릴 대통령이 다 뭐예요. 왜 태어나긴 왜 태어나? 사랑 때문에 태어났지. 어느 답에 갈 거예요. 백만장자예요? 어디 욕심 많은 아줌마들 좀 보자구요. 모른다는 거예요. 욕심 많고 심술궂은 아줌마가 있더라도 내가 지적해 물어 보면 오늘 여기에 왔다가 벼락맞고 간다고 돌아서서 욕을 할까 봐 말은 안 하지만 말이예요, 아무리 심술궂은 여편네라도 물어 보면 그런다구요. 응? '왜 살아요?' 할 때, '왜 살긴 왜 살아. 자식을 위해 살고 남편을 위해 살지' 한다구요. 말은 그렇지만 사랑을 위해서, 사랑 때문에 산다는 거예요. 그 말이라구요. 안 그래요?

그러면 죽긴 왜 죽어? 그건 평면적 사랑을, 평면적 사랑을 이제는 다 체험했기 때문에 싫어질까 봐 입체적 사랑으로 옮겨져 보는 거예요. 그 교체하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복중에서 어머님 보호의 품에서 사랑받으면 좋지만, 거기서 태를 전부 쓰고 있다가 그걸 박차고 나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살던 둥지를 깨뜨려 버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살던 본거지를 파괴해 버리고 제2의 생을 위하여…. 제2의 생은 뭐예요? 제3의 생을 위하여 하나의 새로운 출생을 예비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까 버리든지 차 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왜 해요? 왜? 평면적인 사랑을 넘어와서 입체적인 사랑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을 마음대로 만나고 싶어서. 돌아가는 거예요. 돌아갔다는 말, 거 한국 말은 아주 계시적이라구요. 거 왜 돌아갔다고 해요? 어디로 돌아갔어요? 출발했던 데로 돌아가는 거예요. 돌아갔다는 자체가 참 멋진 말이라구요.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돌아가는 데는 더 낮추어 가지고 떨어지는 사랑이겠어요? 사람의 욕심으로 볼 때에 높이 올라가는 사랑이겠어요? 하나님도 그것을 모를 수 없다는 거예요.

만일 떨어지게끔 돌아갔다 할 때는 하나님이고 뭣이고 큰 사고가 날 거라구요. '이놈의 하나님, 지상에서 살다가 영계가 좋은 줄 알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꼴이요. 지극히 높으신 당신 앞에 뭘 믿을 수 없으니 가겠다'고 항의하더라도 꼼짝달싹못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예요. 수리적이고 미리 비판 기준에 맞게 측정하시는 그런 분이기 때문에 돌아왔을 때는 높은 차원으로 돌아와 가지고 하늘도 기뻐하고 나도 기뻐할 수 있어야 될 거 아니예요. 그건 왜? 논리적으로 그렇게 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