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칙의 말씀에 비춰 자기 생애가 차이가 없게 살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324권 PDF전문보기

원리원칙의 말씀에 비춰 자기 생애가 차이가 없게 살라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선생님의 생애는 심각해요. 오늘 살고 있는 것이 오늘에 비치는 등불이 아니에요. 영원한 등불 가운데서 천 촉(燭)이면 천 촉의 와트(W) 수라는 것이 천년 만년 가더라도 그 천 촉에 대한 백 볼트(V)하고 천 와트에 흐르는 전류의 양은 변함이 없다는 거예요. 영원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이 원리원칙이라면 변하지 않는 이런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만큼 차이가 있느냐 이거예요. 그 차이에 대한 것을 저나라에 가서 보충해야 돼요. 또 가정은 가정을 중심삼고 얼마만큼 참부모의 가정 기준 앞에 차이가 있느냐 이거예요. 차이가 있으면 그 차이를 보충해야 돼요. 국가면 국가의 기준, 세계면 세계의 기준, 하늘땅은 하나님의 심정적 이상권을 중심삼고 차이점에 대한 기준을 중심삼고 보충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저나라의 자기가 머룰 수 있는 자리가 기쁨의 자리가 아니고 거기에서 연단과 시련 과정에서 몸부림쳐야 할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렵고 놀라운 자리예요.

통일교회의 이 자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통일교회 가정이 아니에요. 부모님이 슬프고 외롭고 불쌍한 생애를 남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몇천만년을 거쳐오면서 타락한 이후 심정적 한의 고개가 얼마나 높았고, 한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고 넓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선생님의 백년도 안 되는 일생, 현재 80년 기간이라는 것은 그 기준 앞에 상대적 조건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생각할 때 거기서 자기가 만족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기보다도 남아진 생활에서 충효의 도리와 성인의 도리와 성자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예수님의 한, 2천년 동안 풀지 못한 그 한, 그 모든 전체를 다 소화시키고 넘어설 수 있는 효자와 충신과 성인 성자의 도리의 책임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엄청난 내정적인 인연이 우리 자신에게 말씀을 중심삼고 통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80세가 넘었지만 쉬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왜? 하나님이 쉬지를 않아요. 때가 바쁠수록 촌분(寸分)을 아껴서 그 때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이 자주적인 기쁨을 다시 본연의 창조이상 시대에 가졌던 심정과 일치시켜서 그 이상의 자리까지 가야 돼요. 그 이상의 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타락한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타락한 세계는 큰짐을 달아놓은 거와 마찬가지예요. 그물에 큰 추를 다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된 그물을 던지면 가라앉아서 어디에 떨어질지 몰라요.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위 같은 데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한 과정을 거쳐온 하나님의 심정의 빛의 갈 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참부모의 자리가 기쁘고 좋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에요. 참부모의 아들딸들이 자기 멋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역사는 반드시 이것을 조명해서 차이점에 대한 비판을 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한의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음과 고통의 울타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까지 내가 커버해 주고 그런 환경 여건까지 내가 책임지고 어떻게 이것을 수평 기준의 평면적 기준을 만드느냐 이거예요. 거기에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참부모의 심정적 기준과 하나되어 ‘너를 봐서 수평 기준 앞에 수직적 기준을 내가 정착하겠다!’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몇백배 이상의 기준으로서 동등해져서 인연이 있다 해서 찾아올 수 있는 기준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그렇고, 여러분의 자신들을 대해서도 그래요. 자기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 전체가 수평이 안 되어 있어요. 가정 수평만이 아니라 나라 수평이 안 돼 있어요. 세계 수평이 안 돼 있어요. 이것을 누가 책임지느냐 이거예요. 이것을 후대 후손 앞에, 어머니와 아들 앞에 남기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이 있는 정성을 다하고 난 다음에 천만번 희생하더라도 이것을 수평으로 만들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심정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구요.

그러면 하나님의 그런 심정적 기준 앞에 선생님이 하나님의 슬픔을 알고, 안 것도 힘들었지만 알고 나서 실천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사적인 효자?충신?성인?성자의 도리 이상의 길을 가겠다고 눈물과 피땀을 흘려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